대자보에서 포스트잇으로..'광장' 다시 태어나다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난 지 닷새째. 지난 2일 광진구 구의역 사고 현장을 찾은 시민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연합뉴스


#5월 28일 오후 4시58분 구의역에 진입하던 열차 기관사가 역내 스크린도어 1개가 열려있는 것을 확인했다. 기관사는 관제실에 “구의역 5-1 승강장 스크린도어가 고장난 것 같으니 로그 기록을 확인해 수리하라”고 신고했다. 관제실은 즉시 역무자동화 통제실에 이 사실을 알렸고 통제실은 1분 뒤인 오후 4시59분 스크린도어 정비용역업체인 은성PSD에 고장 사실을 통보했다. 출동 지시를 받은 김군은 곧바로 구의역 역무실에 들러 고장 지점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5-3 승강장과 9-4 승강장 스크린도어에서 이상 신호를 확인한 김군은 마스터키를 가지고 승강장에 올라갔다. 오후 5시50분, 5-3 승강장에서 김군은 도어 옆면에 달린 센서를 수건으로 닦아내 이물질을 제거했다. 30초쯤 지났을까. 장비를 챙긴 김군은 오후 5시54분 9-4 승강장으로 향했다. 김군이 9-4 도어 옆면에 달린 센서를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던 순간에 열차는 구의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5시 57분경 역으로 들어온 열차를 피하지 못한 김군, 꽃 같은 그의 생명은 그렇게 꺾이고 말았다.

2014년 노란 리본은 대한문에서 다시 한번 나부꼈다. 세월호 침몰사고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염원하며 전국 곳곳의 광장에 노란 물결이 일었다.


2016년 포스트잇 추모를 통해 구조적 모순을 꾸짖다

“나도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었다”

“나는 운이 좋아 살아 남았다”

“여자라서 죽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 남은 자들의 몫이고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포스트잇 추모가 시작된 것은 2016년 5월 17일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부터다. 시민들은 황망하게 떠난 혜원씨가 단순히 ‘묻지마 범죄’에 노출된 희생자라고 보지 않았다. 강남역 사건은 피해자 혜원씨만의 문제나 일부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의 구조적 문제라는 인식이 깔렸다. 여성혐오냐 정신질환 범죄냐를 두고 갑론을박이 있기는 했지만 여성은 일상생활에서 느낀 불안감을 털어놨고, 남성은 안전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사회를 목소리 높여 비판했다. 혜원씨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겠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는 2016년 포스트잇의 노란 물결을 만들어냈다.

같은 달 28일 오후 5시 57분 구의역에서 발생한 안타까운 죽음. 부주의해서라거나 근무태도가 태만해서가 아니라 너무 열심히 일하고 너무 성실했기 때문에 비극이 벌어졌다. 고인의 가방에는 뜯지 못한 컵라면이 남아 있었다. 밥 먹을 시간조차 충분히 가지지 못하고 격무에 시달리던 그의 삶이 그대로 그 가방 속에 들어 있었다. 열차에 치인 게 아니라 모순덩어리로 점철된 한국 사회의 구조에 의해 희생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한 시민들은 또 한번 포스트잇을 꺼냈다.

강남역에서도, 구의역에서도, 진도 팽목항에서도 ‘미안합니다’라는,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쓴 메모가 깊은 울림을 준다. 대한민국의 사회 구조적 모순을 규탄하고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는 다짐. 더 이상은 간과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대한민국’이어서 미안하다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노란 물결은 그렇게 소리 없이 웅변하고 있다.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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