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사외이사 A씨는 단호했다. 대화 내내 “대한항공을 위해 한진해운 추가 지원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출자와 관련된 안건이 올라오지 않은 상황이라 본격적인 검토를 펼치고 있지 않지만 현 상황만으로도 대한항공의 추가지원은 어렵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A씨뿐만 아니라 다른 사외이사의 생각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대한항공이 한진해운을 살리기 위해 출자를 하려면 대한항공 사외이사의 찬성이 필요하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인연이 조금씩 있다고는 하지만 사외이사의 잘못된 판단으로 대한항공까지 위험에 빠진다면 이들 역시 배임죄에 속한다.
아무리 밖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하더라도 이들을 납득 시킬 수 없다면 조 회장도 도리가 없다.
A씨는 먼저 “한진해운을 위해 대한항공이 지원을 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고 했다. 지원을 하려면 ‘대한항공이 지원한다면 한진해운이 얼마나 생존 가능성이 있는지’ ‘투입하는 돈이 얼마나 한진해운을 도울 수 있는지’ 정밀하게 살펴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한항공은 지난 2014년 최은영 전 한진해운 회장으로부터 회사를 인수한 후 이미 1조원이 넘는 자금을 한진해운에 투입했다. 지금도 5,000억원가량의 한진해운 관련 리스크가 남아 있다.
한진해운이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로 간다면 5,291억원의 손실 모두를 대한항공이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A씨는 최근 불거진 ‘대주주 책임론’에 대해 “한진그룹은 다른 기업과는 다르게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회장이 한진해운을 직접 경영한 것은 1년 반밖에 안 된다”며 “이미 책임을 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대한항공이) 한진해운을 통해 소득을 취한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백기사로 거론되는 대한항공은 지난 1·4분기 3,233억원의 영업이익을 내며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항공업 특성상 부채비율이 931%에 달한다. 대한항공이 이미 발행한 자산유동화증권(ABS)도 1조원대(발행 예정 포함) 규모다.
A씨는 “대한항공이 한진해운의 부실에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며 “대한항공 책임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미 부실화된 회사에 1조원 가까운 돈을 넣으면서 책임을 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대한항공이 상장사인데 주주들의 가치 훼손 문제도 있고…”라고 언급, 추가 지원이 주주 가치와 위배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역으로 섣불리 지원을 결정했다가 사외이사들이 배임행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을 명확히 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른 사외이사도 입장을 같이했다.
사외이사 B씨는 “해운업에 대한 예측이 계속 빗나가서 이렇게까지 온 것 아니냐”며 “선입견을 갖고 (한진해운 지원 여부를) 볼 것은 아니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그는 “채권단에서 대한항공에 압력을 넣고 있고 대한항공이 한진해운을 돕지 않으면 대한항공 여신에도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은근한 협박도 있지만 사외이사 입장에서 대한항공을 위해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아울러 “외부 압력 대신 회사 스스로 사업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돼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하다”며 우려했다. 한 사외이사는 “자율협약도 있고 법정관리도 있고 이런 상황을 위해 법적인 단계를 만들어 놓은 것인데 은행들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계열 회사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고 지적했다.
사외 이사들의 이 같은 발언은 14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서울경제신문과 단독으로 가진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과도 궤를 같이한다. 조 회장은 당시 ‘한진해운에 1조원가량을 투입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준비를 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한진해운에) 투자를 할 만큼 했는데 또 무슨 투자를 하냐. 어떻게 하란 말인지… ”라며 답답한 심경을 드러냈다. ★본지 15일자 1·5면 참조 한진그룹 관계자 역시 “조 회장이 사재출연을 할 수 있는 여력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조 회장에 이어 사외이사들까지 이처럼 추가 지원에 난색을 표함에 따라 한진해운의 정상화를 위한 금융당국과 채권단의 고민도 더욱 커지게 됐다. /박재원기자 wonderfu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