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가 사라졌다-오스트리아 금융 위기

월가 주가 대폭락→보호무역 강화→국제적 금융 리더십 실종→정치적 반목→국가간 불신 심화, 공조 체계 붕괴→금융위기 확산→무역 규모 급감→세계적 공황. 1930년대를 할퀴었던 세계 대공황의 심화 과정이다. 한마디로 악순환이다. 그 세 번째 단계인 국제적 금융 리더십 실종을 확인하는 사건이 1931년 6월16일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금융위기를 통해 ‘불을 끌 소방수’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오스트리아 위기의 핵심은 은행 부실. 비엔나 크레디트-안슈탈트은행(Credit-Anstait)에서 비롯됐다. 이 은행은 정부의 대형화 정책에 따라 합병을 거듭해 중부 유럽 최대은행으로 부상했던 공룡. 오스트리아 전체 대출의 70%까지 점유했으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인출 사태에 직면했다. 첫째, 누적 부실 규모가 예상을 훨씬 웃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합병 과정에서 부실을 떠안은 탓이다.

악재는 예금 인출 사태로 이어지고 5월 중순 크레이트-안슈탈트 은행은 부도를 내고 말았다. 정상화를 위해 필요한 자금은 미화 2,100만 달러. 오스트리아 정부는 국제연맹 금융위원회에 손을 내밀었다. 급하게 11개국에서 1,400만 달러가 지원됐으나 규모가 작은데다 지원 시기가 지연돼 예금 인출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그나마 이 자금도 곧 바닥을 드러내고 오스트리아는 새롭게 2,000만 달러 조달에 나섰다.

바로 이 시점에서 위기의 두 번째 요인이 터져 나왔다. 프랑스가 새로운 차관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두 달 전에 체결된 독일·오스트리아 관세동맹의 파기를 요구하고 나선 것. 게르만 민족의 단결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프랑스의 요구를 거부한 오스트리아 내각은 바로 무너졌다.

새 정부는 국제금융의 해결사를 자처해 온 영국에 매달렸다. 영국은 ‘금융과 정치를 혼동하는 프랑스를 흉보듯’ 단독 차관을 댔다.*

문제는 1931년6월16일 제공된 차관의 금액과 기한. 영국의 차관 제공 소식은 각국의 경제 정책당국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불과 700만 달러에 기간도 1주일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국제 금융의 최종 대부자’로 평가받던 영국과 잉글랜드 은행의 신뢰도에 금이 갔다. 프랑스는 영국의 비협조에 분개해 보유 파운드화를 내다 팔아 금을 사들였다. 더 이상 믿을 구석이 없다는 인식이 퍼지고 각국은 제각기 따로 놀았다.

애초부터 국제 경제협력에 찬물을 끼얹은 주인공은 달리 있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 치하의 미국이 그랬다. 미국은 영국의 대 오스트리아 단독 차관 1년 전(1930년 6월17일), 악명높은 스무트 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을 발효시켜 국제무역에 결정타를 가했다. 2만여개 수입 공산품에 대한 평균 59%, 최고 400%에 이르는 고율관세를 부과한 이 법은 관세전쟁을 낳았다. 보호무역을 넘어 보복무역의 양상으로 치달은 국제 무역은 불과 3년 만에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대공황 직후 세계무역 규모 추이. 마치 거미가 거꾸로 집을 짓듯 축소 일로를 걷고 있다. 출처 찰스 킨들버거 지음, 박명섭 옮김 ‘대공황의 세계’ 218쪽.(국제연맹 자료에서 재인용)


국제무역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미국의 관세법 제정 1년 뒤인 오스트리아 금융위기는 각국의 금융시스템을 뿌리부터 뒤흔들었다. 단독 차관에 불만을 품은 프랑스의 파운드 매입, 국내 경기 및 무역 위축에 시달리던 영국은 100여일 뒤에 금본위제도를 포기했다. 영국이 금본위제도를 내던진 후 6년 동안 45개 국가가 그 뒤를 따라 금본위제도를 운영하는 나라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위기 1년 뒤(1932년 6월16일), 보다 근본적으로 문제를 풀자는 국제회의가 스위스 로잔에서 열렸다. 독일의 전쟁배상금을 경감시켜 세계 경제 회복을 도모하자는 게 핵심 의제. 영국과 프랑스·이탈리아·벨기에·일본 등 1차대전 승전국과 패전국 독일은 23일간의 회의에서 합의를 찾았다. 1차대전 직후 1,320억 금마르크로 정해진 후 도스안(Dawes Plan)과 영안(Young Plan)을 거치며 1,210억 라이히스마르크(명목지폐)로 줄어들었던 독일의 전쟁배상금을 총액 30억 마르크까지 경감하자는 ‘로잔의정서’에서 합의한 것이다.

현금배상은 물론 석탄이나 목재 같은 현물과 설비까지 악착같이 뜯어가던 유럽 각국이 독일에 선심을 쓴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미국에 대한 우회적 압박. 독일의 배상금을 깎아줬으니 유럽 각국이 미국에 진 전쟁부채 119억 달러도 대폭 경감해 달라는 요구가 로잔의정서의 진짜 목적이었다. 로잔의정서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미국의 양보가 필수적이었으나 승전국들은 낙관적으로 봤다.


미국의 후버 대통령이 세계 경제의 동반 침체를 의식해 연합국의 대미 전쟁채무를 1년간 유예해준다는 후버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던 마당. 추가적인 채무삭감이 가능하다고 내다본 것이다. 기대는 빗나갔다. 미국은 탕감은커녕 삭감 논의에도 응하지 않았다. 결국 로잔의정서는 각국 의회의 비준도 못 받고 효력을 상실한 채 불신만 증폭시켰다. 불만이 더욱 커진 독일에서는 히틀러가 세력을 불려 나갔다.***

로잔회의 1년여 뒤(1933년 6월12일)에도 비슷한 노력이 있었다. 불황 타개, 협력 강화를 위해 전세계 67개국(한창때 국제연맹 회원국 63개 국보다 많았다)이 영국 런던에 모여 세계경제회의를 개최한 것. 각국 총리와 외무장관·재무장관들이 참석한 세계경제회의는 크게 두 가지 의제를 다뤘다. 통화 공조와 무역장벽 철폐. 국제 공동통화 ‘디나르(Dinard)’ 도입도 논의되고, 미국과 영국·프랑스 간 통화안정협정은 거의 합의에 이르렀다.

회의의 최종 결과는 파국. 각국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힌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미국이 초를 쳤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7월 초 발표한 ‘통화 안정은 민간은행의 문제이지 정부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교서가 3국 간 통화안정협정을 깨뜨렸다. 미국 상품이 국제 경쟁력을 갖추려면 달러가치 절하가 필수적이며 국제공조는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루스벨트의 우려가 세계경제회의를 무력화시켰다.

세계경제회의 실패 후 시대의 조류는 블록화. 영국은 영연방경제회의를 잇따라 열어 ‘스털링 블록(Sterling Block)’을 만들었다. 영연방국가끼리 최혜국 대우를 유지하자는 내용의 불록화는 다른 나라들을 자극했다. 미국은 남미에 공을 들이고 프랑스는 아프리카와 중동부 유럽을 영향권에 두려고 애썼다.

패거리가 패거리를 낳는 블록 경제의 후유증은 후발 제국주의국가군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패전으로 식민지를 상실했거나 상대적으로 적었던 독일과 이탈리아·일본은 파시즘으로 치달으면서도 경제 블록 형성에 목을 맸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은 영국과 프랑스처럼 생활권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레벤스라움(Lebensraum)’에 매달려 석유와 광물 자원, 노동력이 풍부한 소련을 침공했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내세웠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역시 경제 블록의 변형된 형태다.

세계적 규모의 불황에 대한 독보적인 연구로 유명한 미국의 경제사가 찰스 킨들버거는 오스트리아 위기부터 2차대전 직전까지 세계 경제 상황을 이렇게 정리한다. ‘영국은 (국제 금융 위기 진화의 소방수가 되려는) 의지가 있으나 실력이 없었다. 미국은 그 반대. 실력을 갖췄지만 의지가 부족했다. 프랑스는 안정을 이룰 만한 힘은 없었던 대신 파괴할 만한 힘은 있었다.’ 전간기(戰間期), 즉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국제경제 기상도는 ‘따로 국밥’, ‘너 죽고 나 살자’로 요약될 수 있다. 나만 살자는 이기주의는 세계대공황이라는 수렁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누적된 갈등과 불만은 2차세계대전에서 피를 흘리고 나서야 겨우 풀렸다.****

월가의 거품이 꺼지며 촉발된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요즈음, 국제 무역의 축소 동향이 심상치 않다.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도 몇 년째 ‘무역 1조 달러’를 밑돌고 있다. 방법이 없을까. 기꺼이 고통을 분담하며 국제 협력을 강화하고 상호 신뢰를 회복하는데 길이 있다. 과거와 같은 속도와 외형에 대한 과도한 기대도 금물이다. 늦더라도 꾸준히, 지속 가능한 경제만이 살 길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제1차대전 승전국인 프랑스는 패전국 독일을 유독 가혹하게 다뤘다. 배상 요구에서 가장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고 1922년에는 독일의 최대 공업지대인 루르를 점령해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단초를 제공했다. 한 수 아래로 여겼던 독일에 1870년 전쟁(프랑스-프로이센)에서 패해 막대한 배상금을 물었으며 1차대전에서도 국토를 유린 당했다는 원한 때문이다.

** 스무트 홀리 관세법은 1929년 주가 대폭락으로 야기된 공황을 맞아 국내 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갖고 있었으나 입법 과정부터 논란이 많았다. 당시 미국 경제학자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1,028명의 학자들은 다른 나라의 보복관세를 유발할 것이라며 반대 서명서를 냈다. 그래도 후버 대통령은 ‘미국 경제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다’며 입법을 강행했다. 미국은 20세기 중반 이후 자유무역에 앞장섰으나 건국 이래 제2차 세계대전까지 가장 높은 관세율을 유지한 나라다. 특히 보호무역을 선호하는 공화당은 관세를 ‘상비약’으로 여겼다.

*** 실패한 로잔회의는 스타를 낳았다. 존 메이너드 케인즈. 종전에서 로잔협정까지 14년을 끌어온 배상 협상은 독일이 물어야 할 배상금이 지나치다는 자기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케인즈는 이미 1919년(당시 36세)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논문을 통해 독일에 대한 가혹한 배상이 전후 복구와 경제 회복을 지연시키고 새로운 갈등을 유발할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케인즈의 명성은 1936년 펴낸 ‘고용과 이자, 화폐에 대한 일반이론’이 공황을 타개할 비책으로 각광받으며 더욱 확고해졌다.

**** 혹자는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전쟁이 일어나는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1,2차 세계대전을 통해 전시동원체제 아래 고용과 생산의 극대화를 이룬 미국의 경험이 재연될 것이라는 기대에 근거하지만 요즘에도 그럴까. 어림도 없는 얘기다. 전면전인 경우라면 핵폭탄 몇 개로 지구촌이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 제한적인 국지전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몇 년씩 지속되며 전차며 비행기를 수십만대씩 생산해 전시 완전고용이 이뤄졌지만 요즘에는 단 며칠이면 전쟁이 끝난다. 최근의 하이테크 전쟁에 동원되는 무기 제작에는 극히 소수의 과학기술자와 엔지니어만 필요할 뿐, 대량 고용을 유발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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