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뮤지컬을 한 편 봤다. 신문을 파는 아이들이라는 뜻의 ‘뉴시즈(Newsies)’라는 작품이다. 1899년 뉴욕에서 있었던 뉴시즈들의 파업이 소재가 됐다. 소년들의 저항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같았다. ‘신문왕’이라 불리던 거대언론 자본가 조지프 퓰리처를 상대로 한 싸움은 누가 봐도 필패의 승부였다. 그러나 퓰리처가 뉴시즈에 주는 신문 공급가격을 일방적으로 올린 것은 자기부담을 전가한 것으로 너무도 부당했기에 소년들은 이길 수 있었다. 소년들은 퓰리처의 지독한 탄압에도 뜻을 꺾지 않았고 강자의 추악한 탐욕을 세상에 적극적으로 알렸다. 차츰 뉴욕시민들 사이에서도 뉴시즈를 지지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거인 골리앗’ 퓰리처도 결국은 ‘꼬마 다윗’ 뉴시즈에게 굴복했다.
‘뉴시즈’에서는 약자를 괴롭혔던 퓰리처였지만 그에게도 ‘꼬마 다윗’처럼 의기가 충만했던 시절이 있었다. 최근 출간된 평전 ‘퓰리처’를 보면 그는 기자 초년병 때 날카로운 폭로기사로 권력자와 부자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협박을 당하고 위험이 닥쳐도 절대로 굴하는 법이 없었다. 부패한 정치인과 부자들이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얕보고 괴롭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젊은 퓰리처였다. 그랬던 퓰리처가 거대신문 뉴욕월드의 총수가 되고 나서는 딴판으로 변했다. 언론을 이용해 미국 대통령 선거의 판세를 뒤흔드는가 하면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선정적인 기사를 마구 쏟아내고 전쟁까지 부추겼다.
뮤지컬 ‘뉴시즈’와 평전 ‘퓰리처’는 공히 젊은이의 순수함을 말하고 있다. 그런 젊은이의 꿈과 희망에 주목하고 궁극적으로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임을 직시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겼다.
지난달 여섯 권으로 완간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제3인류’에서는 초소형인간 ‘에마슈’가 희망이 사라져가는 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암시된다. 제2인류이자 현존 인류인 호모사피엔스의 10분의1정도 크기의 몸으로 창조된 에마슈는 처음에는 방사능에 취약한 인간을 대신해 원자력발전소를 수리하는 등 인간의 도구로 활용되지만 차츰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나가고 침략을 일삼는 일부 국가와는 전쟁을 수행하기까지 한다. ‘꼬마 인간’ 에마슈에게는 나름의 장점이 있다. 탁월한 지적능력을 갖췄으며 사회공동체 및 자연환경과 더불어 공존하고 상생하려는 삶의 태도가 이들이 가진 미덕이다. 반면 제2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경제발전을 핑계로 삶의 터전인 지구를 파괴하고 정치적 지배욕에 눈이 멀어 전쟁을 일삼다가 스스로 자멸의 길을 재촉하고 있다.
결국 꼬마인간 에마슈는 현존 인류를 대신할 일곱 가지 제3인류의 미래상, 다시 말해 쾌락주의와 종교주의·여성주의·생명연장·우주개척·인공지능·초소형인간 가운데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꼬마’들이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인 셈이다.
두 달 전 총선에서는 여당이 뜻밖으로 패배했다. 고령층이 다수인 우리나라의 연령 구조상 보수여당이 과반수는 물론 단독개헌 의석까지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점쳐졌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투표에 대거 나서면서 예상이 뒤집혔다. 이 또한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꾼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뮤지컬 ‘뉴시즈’로 돌아가 보자. 당시 뉴욕 주지사로서 파업을 중재한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꼬마들의 승리를 축하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어느 세대든 권력의 최고지점에 오른 바로 그 순간 한발 물러나서 젊은이들과 함께 발을 맞춰나가야 하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우리의 세상을 이제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난 여러분의 손에 달린 미래가 밝고 풍요로울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지난주 국회 연설에서 협치를 다짐한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마음가짐으로 남은 임기를 보냈으면 한다. 총선에서 뜻밖의 승리를 챙긴 야당도 국민이 준 권력 앞에 겸허해야 함은 마찬가지다. hnsj@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