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 2005년 제주도를 세계평화의 섬으로 선포했다. 제주 4·3항쟁이라는 슬픈 역사를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회복하고 평화 정착을 위한 정상외교의 정신을 이어받아 제주도가 세계평화의 섬으로서 역할을 하도록 지정한 것이다. 이에 앞서 제주도에서는 이미 지정학적 여건에 따라 한일, 한소 정상회담과 남북 장관급 회담이 이뤄지기도 했다.
올해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남북관계는 여전히 경색 일로를 걷고 있다. 민간 차원의 6·15기념 남북공동행사는 올해도 무산됐고 정부는 북한이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 있는 변화를 보일 때까지는 남북 간 대화는 물론 민간 교류도 적절치 않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민간교류는 재개돼야 한다. 1차 남북 정상회담 이전으로 되돌아간 남북 관계가 서릿발처럼 냉랭하다가 하루아침에 얼음 녹듯 녹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내 원수 보듯 하다가 하루아침에 마주 보고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도 서서히 봄이 오면서 얼음이 녹고 물이 흐르듯 지금이라도 민간교류를 재개해 조금이나마 관계 회복을 위한 노력을 이어간다면 나중에 남북이 어색하게나마 다시 웃으며 손을 내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한다. 아예 끈을 놓지는 말자는 얘기다.
그런 차원에서 제주도는 남북교류와 신뢰 회복의 가교가 될 수 있다. ‘세계평화의 섬’ 제주도는 12년 넘게 ‘비타민C 외교’를 펼치고 있다. 북한에 감귤 보내기 사업을 통해서다. 지방자치단체의 남북교류협력 사업은 1998년 제주도가 북한에 감귤 100톤을 보내면서 시작됐다. 제주도는 지난해 정부의 승인을 받고 민족화해 제주포럼을 통해 감귤 북한 보내기 사업 재개와 한라에서 백두까지 남북 교차 관광사업, 한라산과 백두산 생태환경 보존을 위한 공동연구, 그리고 제주도에서 북한 노선을 연결시키기 위한 평화크루즈라인 개설 등 다섯 개 분야의 교류협력 사업을 제안한 바 있다. 또 광역두만강개발계획(Greater Tumen Initiative·GTI)을 위한 지방정부협의체에도 참여 중이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제주도가 추진하는 신재생에너지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 자립 마을’ 모델을 국제기구 등과 손잡고 북한에 접목하는 사업도 제안했다. 원자력이나 석유 등 갈등과 분쟁 요소가 큰 에너지 대신 풍력과 태양력 등 신재생에너지를 통한 협력 모델을 제시해 미래 에너지에 대한 준비와 남북 관계 진전을 함께 도모하겠다는 취지다.
지금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좌우할 중차대한 시기다. 그동안 북한을 봉쇄하려다가 우리의 협상 카드만 줄인 게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 2년 넘게 북한 감귤 보내기 사업을 통해 ‘비타민C 외교’를 해온 제주도의 긍정적 사례 또한 연구해볼 일이다. 감귤처럼 받는 사람, 주는 사람 모두 부담 없는 품목이 어디 있겠나. 조금만 융통성을 갖고 접근한다면 원칙과 실리 모두 살리는 방법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원희룡 제주도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