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의 나라 조선’ 전시 전경.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82만 여 활자 중 5만5,000여 자를 실제 사용됐던 서랍에 담아 체계적으로 한눈에 볼 수 있게 전시했다.
성리학적 이념을 실현하고 문치주의를 표방했던 조선에서 책을 간행할 수 있는 ‘활자’는 곧 권위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조선의 왕실과 국가기관이 활자 제작을 주도했던 이유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이영훈) 세계 최대 규모인 82만여자의 활자를 소장한 까닭이기도 하다. 이 중 금속활자가 약 50만 자, 목활자가 약 30만 자인데 대부분 조선시대인 17세기~20세기 초에 제작됐다. 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활자가, 국가기관이 공들여 만든 최고 수준의 활자가 이처럼 체계적으로 많이 남아있는 곳은 중앙박물관이 유일하다. 서양에도 금속활자가 이처럼 대규모로 정리돼 전해지는 경우 없고, 중국도 마찬가지이며, 조선의 활자술을 배워간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만든 금속활자 3만여 자가 전할 뿐이다.국립중앙박물관이 작정하고 이들 유물을 공개했다. 상설전시실 1층 고려3실에서 개막한 ‘활자의 나라 조선’에서다. 활자를 종류별로 담은 ‘활자 보관장’을 수리 복원한 것을 포함해 활자들을 분류·고증한 연구결과에 기반한 전시다.
전시장 한가운데 8m×1.5m의 공간에는 소장 활자 중 5만 5,000여 자에 이르는 활자를 실제 사용됐던 활자서랍에 담아 종류별로 진열했다. 왜 조선을 ‘활자의 나라’라고 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고고역사부 이재정 학예관은 “제작기술이 정교해 예술적으로도 손색없는 조선의 금속활자는 검박함을 미덕으로 여긴 유교 국가 조선에서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예술품 대신 이들 금속활자와 인쇄한 책에 예술과 기술을 집약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교경전과 법전 등 통치에 필요한 서적을 만들기 위해 세종 16년이던 1434년 제작된 ‘갑인자’로 찍은 첫 책은 왕의 정치지침서로 꼽히는 ‘대학연의’였고 세종은 이를 경연(經筵·임금이 신하들과 학문을 논하던 것)의 첫 교재로 사용했다. 정조의 치밀한 활자 개량의 결과로 1796년 제작된 ‘정리자’는 왕권을 상징했다. 그 첫 간행물은 정조가 어머니를 모시고 사도세자의 묘인 화성 현륭원에 행차한 기록인 ‘원행을묘정리의궤’였다. 국가 전유물이던 조선 전기 금속활자를 비롯해 민간에서 두루 사용된 목활자 등을 다양하게 볼 수 있다. 9월11일까지.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