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회의 포문은 옥스퍼드교구 주교인 새뮤얼 윌버포스가 열었다. 윌버포스는 ‘매끈거리는 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만큼 유창한 언변으로 유명했던 인물. 주로 감성에 호소했으나 먹혀 들어가는 분위기였다. 청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얻은 윌버포스 주교는 진화론 옹호론자들이 모인 쪽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댁들의 주장에 따르면 댁들의 조상 중에 원숭이가 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그 원숭이가 할아버지 쪽 조상입니까, 아니면 할머니 쪽 조상입니까?’
바로 그 순간, 동물학자 토머스 헉슬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하나님이 저 양반을 내게 넘겨주셨군.’ 자리에서 일어난 헉슬리는 주교의 조롱을 맞받아쳤다. ‘내 조상이 원숭이라는 사실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다만 주교님처럼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과 혈연관계라는 점이 부끄럽습니다.’
헉슬리의 되받아치기에 토론장 곳곳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졌다. 창조론을 믿는 한 여성은 놀란 나머지 졸도해버렸다. 분위기가 진화론 우세 쪽으로 잡혀가자 로버트 피츠로이 제독이 나섰다. 젊은 시절 비글호의 선장으로 다윈의 탐사에 동행했었던 피츠로이 제독이 창조론을 펼치며 ‘오로지 성서 만이 진리’라고 외쳤을 때 청중들은 야유를 보냈다.
다음 토론자는 다윈의 친구이며 식물학자·탐험가인 조셉 후커. 가장 논리적으로 진화론의 당위성을 조목조목 설명해 청중을 매료시켰다. 치열한 논쟁이 오간 토론회가 끝난 뒤 양측은 서로 승리했다고 여겼지만 정작 승자는 따로 있었다. 주교에게 한방 먹인 헉슬리가 스타로 부상한 것이다. 덕분에 진화론도 급속히 퍼졌다.
옥스퍼드 논쟁을 통해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헉슬리는 뛰어난 후손도 여럿 남겼다. 유네스코 초대 사무국장을 지낸 생물학자 줄리언 헉슬리와 디스토피아 소설인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 1963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생리학자 앤드루 헉슬리가 그의 손자들이다.
‘종의 기원’ 출간과 ‘옥스퍼드 토론’은 길고 긴 ‘창조-진화 논쟁’의 서막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성서를 신봉하는 창조론자들과 적자생존을 주장하는 진화론자들이 맞섰다.* 선의의 경쟁도 펼쳐진다. 창조론은 창조과학·지적설계론으로 발전하고 진화론도 ‘진화론 자체가 일부 철학적’이라는 점을 인정하며 서로 발전하고 있다. 부작용이 적지 않지만 **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미국에서도 창조-진화 논쟁이 국가적 관심사로 떠오른 적이 있다. 1925년 스콥스 원숭이 재판 역시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었다. 발단은 테네시주의 ’버틀리법‘. ‘공립학교에서는 인간을 원숭이의 후손이라고 가르칠 수 없다’는 내용의 버틀리법이 반발을 불렀다. 데이턴 고등학교의 과학·수학교사 겸 축구코치였던 존 토머스 스콥스(당시 24세)는 대놓고 학생들에게 진화론을 가르쳐 테네시주로부터 고발 당했다. ‘원숭이 재판’으로 이름 붙여진 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국내외 기자들이 모여들고 대서양 횡단 케이블의 전보 사용량도 평소보다 두 배 늘어났다.
세인의 시선을 더욱 끈 것은 변호인단.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무장관을 지낸 기독교 근본주의자 제닝스 브라이언이 검찰 측 변론을 자처하고 나섰다. ‘고집과 무지가 교육을 무너뜨린다’는 피고 측 변호인단과 ‘성서는 단 한 줄도 틀리지 않다’던 테네시주 검찰이 맞선 결과는 원고인 테네시주의 승리. 배심원단은 피고 스콥스 선생에게 법정 최저형인 100달러 벌금형을 내렸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판결에서는 이겼지만 재판 과정의 보도를 통해 전국적인 비웃음을 샀다. 테네시주는 스콥스를 방면함으로써 논쟁의 파급을 막았다. 미국에는 여전히 창조론 교육을 금지한 주들이 남아 있다.
** 진화론은 치명적인 부작용도 남겼다. 찰스 다윈의 고종사촌으로 의사 출신 통계학자이자 사회학자인 프랜시스 골턴은 진화론을 우생학으로 연결시켰다. ‘사람의 성공을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우수한 유전인자’라며 ‘저능아나 장애인들은 수도원에 격리해 단종(斷種)시켜야 한다’는 골턴 우생학과 사회적 다윈주의는 히틀러의 독일에서 꽃피웠다. ‘인종 대청소’라는 이름으로.
우수한 종이 살아 남는다는 진화의 논리, 인간 문명 발달을 확신했던 히틀러의 연설에는 이런 게 있다. ‘강하고 능력 있는 자는 승리하는 반면 약한 존재는 패배한다. 투쟁은 모든 것의 아버지다. 사람이 자기를 보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성의 원리가 아니라 오직 가장 야만적인 투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다.’ 영국 스완시 대학의 클라이브 폰팅 교수의 역저 ‘진보와 야만’에 따르면 20세기의 생산성 향상과 노동의 유연화, 구조조정, 비정규직 확산은 히틀러의 적자생존 논리와 맥락을 공유한다. 사회적 진화론에 입각한 적자생존과 무한경쟁은 진화나 진보로 보이지만 결국 야만을 잉태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