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논단] 불평등 심화와 민주주의 위기

정진영 경희대 국제학과 교수
"경제위기·불평등 확산 주 원인"
세계화에 국제적 반감 커지며
트럼프 등 포퓰리스트 급부상
민주주의 위기론까지 나왔지만
건강성 회복 기회로 작동할 수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Brexit)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영국인들이 탈퇴를 선택했다. 미국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예비선거에서 아웃사이더인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와 버니 샌더스 민주당 후보가 돌풍을 일으켰다. 프랑스의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전선의 마린 르펜 당수에 대한 지지도가 크게 올랐으며 스위스·핀란드·폴란드·헝가리·스웨덴·네덜란드 등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도 포퓰리스트들의 기세가 대단하다. 이들에 대한 지지도 증가에서 발견되는 공통적 요소는 세계화에 대한 사회 저변의 깊은 반감이다. 세계화가 경제위기를 불러오고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세계화가 국가와 민주주의를 약화시켜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는 주장에 대한 공감대도 널리 형성됐다.


브렉시트를 계기로 세계화에 대한 반성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이유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인식이다. 세계화가 이를 적절히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 질주한 결과다. 개방과 통합은 전체적으로는 이익을 가져온다. 그러나 이익을 누가 어떻게 차지하고 그러한 이익을 위해 부담해야 하는 피해를 누가 얼마만큼 감당하는가는 매우 정치적인 문제다. 그런데 기존의 제도권 정치는 정도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나 부와 권력을 쥔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이익은 상층부의 소수가 독점하고 부담은 국민 대다수가 지는 구조가 지속되고 있다.

지난 2007~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로 번졌을 때 월가 점령 운동으로 대표되는 반세계화 운동의 불길이 세계로 확산됐다. 1%가 99%를 착취하는 금융 세계화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나 금융위기가 잠잠해지면서 이 운동의 열기도 사라졌다. 금융기관들이 저지른 엄청난 위기에 따른 피해를 국민이 낸 세금이나 간접세와 마찬가지인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감당했는데도 말이다. 1997~1998년 동아시아 외환위기 때도 그랬고 2010~2012년 유로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계화가 불평등을 가져오는 구조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몇 가지는 분명하다. 국경을 가로질러 자유롭게 이동하는 발 없는 자본에 비해 국경 장벽이 높은 발 있는 노동이 불리하다. 무역과 투자의 자유로운 흐름은 선진국의 값비싼 노동력을 개도국의 값싼 노동력이 대체하는 효과로 선진국에 고용 불안과 저임금을 가져오는 주요한 요인이 된다. 국가경쟁력을 명분으로 해 추진된 법인세 인하나 사회보장제도 약화도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연구개발(R&D)과 특허권으로 무장한 세계적 거대 기업들이 종횡무진 위력을 떨칠 수 있는 장이 마련됐다. 중국과 인도의 약진으로 국가 간 불평등이 약화한 듯 보이지만 특권과 특혜 속에 추진된 개도국의 고속 성장이 개도국 내부의 불평등을 심화시켜온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세계화의 역풍이 언제든지 몰아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 영국, 미국, 유럽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우리는 이미 이를 목격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국민 대다수의 누적된 불만이 정치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현상을 두고 거의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한다. 영국인들의 브렉시트 선택은 바보짓이고 민주주의의 자살골이라고도 한다. 과연 그럴까. 영국이 잘될지 유럽연합(EU)이 잘될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반세계화 포퓰리스트들의 등장도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릴지 민주주의의 건강성 회복을 위한 기회로 작동할지 두고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과 같은 불평등 심화는 사회 유지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증대시키고 경제의 지속적 성장도 불가능하게 한다. 대한민국도 이 문제에서 결코 예외가 아니다. 흙수저·금수저 논란,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 등등 소위 ‘헬조선’ 현상이 뚜렷하다.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서는 트럼프든 샌더스든 제대로 된 포퓰리스트들이 나오기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그만큼 한국 민주주의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아닌가 걱정스럽다. 정진영 경희대 국제학과 교수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