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운드화 폭락의 85년 데자뷔

파운드화 폭락과 정책 대안 부재.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이탈)의 후폭풍을 앓고 있는 요즘 얘기가 아니다. 85년 전 이맘 때 영국이 그랬다. 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된 금본위제도에 복귀한 1925년 이래 4.86달러를 유지해온 파운드화의 가치가 불과 며칠 만에 23% 가까이 줄어들었다. 파운드 당 미화 3.75 달러.

마침 뉴욕에서 시작된 주가 대폭락으로 세계가 공황으로 빠져들던 시절. 달러와 더불어 양대 기축통화였던 파운드화의 단기 초약세는 가뜩이나 불안한 세계금융시장을 뒤흔들었다. 미국과 프랑스 같은 전승 강대국은 물론 패전 독일까지 런던 시장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스웨덴과 덴마크 등 작은 나라들도 영국 파운드화를 내던지고 금이나 달러를 사들였다.

무엇이 파운드화 폭락을 촉발했을까. 아직도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통상적인 설명은 1931년5월 말 완성돼 7월13일자로 인쇄된 맥밀런 보고서(Macmillan Report) 탓. 잉글랜드은행이 보유한 금과 파운드화의 대외공여 규모가 예상 외로 적다는 점이 밝혀지는 통에 불안해진 해외 투자가들이 보유 파운드화를 팔았다는 해석이다.

다른 시각도 많다. 잉글랜드은행을 경쟁상대로 여기던 프랑스 중앙은행이 파운드화 투매에 나섰다는 것이다. 몇 달 전에 발생한 오스트리아 금융위기 처리를 둘러싼 영국과의 불협화음으로 프랑스가 앙갚음했다는 해석이다. 그러나 파운드 폭락 초기에는 그랬는지 몰라도 프랑스 중앙은행은 막판까지 영국의 파운드화를 지지하기 위해 애썼다는 게 정설이다.

미국도 파운드화 지지에 미적거렸다. 경제사가 찰스 킨들버거의 ‘대공황의 세계’에 따르면 파운드화 하락 초기에 미국과 프랑스의 애매 모호한 태도는 파운드의 속락을 부추겼다. 오스트리아에서 시작해 독일로 퍼져가는 금융경색으로 위기감에 젖어 있던 네덜란드와 벨기에, 스웨덴, 스위스, 덴마크 중앙은행은 공공연하게 파운드를 팔아 달러나 금을 샀다. 강대국이 이렇다 할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는 가운데 작은 나라로서는 자기 보호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분명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 맥밀런 보고서는 의도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맥밀런 보고서는 영국의 위기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을 제시하기 위한 맥밀런 위원회가 채택했던 최종 리포트. 맥밀런 위원회에 포진한 케인즈 등은 영국의 수출부진과 물가하락의 대안으로 유효 수요 확충을 꼽았다.** 맥밀런 보고서에서 케인즈 등은 임금인하는 불황 타개책이 아니며 금융정책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환경에서는 유효수효를 끌어내는 정책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담았다. 훗날 케인즈 경제학의 뼈대가 제시된 셈이다.***


두 번째는 영국의 금본위제도가 무너졌다는 점. 맥밀런 보고서가 나온 지 10일 만에 비슷한 시각으로 노동과 외환시장을 다룬 메이 보고서(May Report)로 비관적인 전망은 더욱 번졌다. 작은 나라들과 큰 손들의 파운드화 매도 공세에 미국과 프랑스 같이 금을 많이 보유했던 메이저 중앙은행들의 개입도 소용없었다. 결국 영국은 파운드화 초약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해군 반란**** 같은 사회 혼란이 겹치며 9월21일자로 금본위제도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47개국이었던 금본위제도 채택국가는 6년 뒤 하나도 남지 않았다. 세계는 대공황의 늪에 빠졌다.

파운드화 폭락과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대안 부재의 상황이 옛날 얘기일 뿐일까. 대안이 없는 몇몇 국가에서 파시즘과 나치즘 같은 극우의 독버섯이 피어났다. 혼란과 몰가치성의 시대, 역사의 반복 가능성이 두렵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1870년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패배한 이래 프랑스는 독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에도 강경 일변도의 입장을 취했다. 독일계 주민이 대부분인 오스트리아의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적은 금액이나마 즉각적인 지원에 나섰던 영국을 프랑스는 못마땅하게 여겼다. 여기에 대해서는 2016년6월16일자 ‘선수가 사라졌다-오스트리아 금융 위기’에서 다뤘다. 2016년1월11일자 ‘루르의 교훈, 미소가 철혈(鐵血)보다 강하다’에서는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감정이 어떠했는지가 나온다.

** 케인즈가 1936년 내놓은 거시경제학의 명저 ‘고용과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의 실천적 처방이 먼저 나온 게 맥밀런 보고서라는 해석이 있다. 케인즈의 ‘일반이론’은 대공황 후기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전세계의 경제학을 지배했다.

*** 노동당 정부 아래 영국 사회와 경제학계는 맥밀런 보고서 이후 열띤 논쟁을 펼쳤다. 복지 축소와 재정 확대를 둘러싼 논쟁은 결론을 못 내고 갈팡질팡하다 불황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 1931년 9월 기동훈련 출동을 앞둔 영국 대서양함대의 파업을 말한다. 복지 축소의 일환으로 공무원 임금을 삭감하면서 수병들의 급여를 줄이겠다는 방침이 사상 초유의 함대 파업을 불렀다. 특히 영관급 3.7%, 위관급은 11.8%를 깎이는 반면 고참 수병은 최고 25%를 삭감 당한다는 소식에 함대의 헌병 역할을 하던 해병대원들까지 파업에 참여했다. 사태는 10% 삭감이라는 양보안이 나오자 진정됐으나 총톤수 35만톤에 이르는 세계최강 영국 대서양함대마저 파업에 나섰다는 소식은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영국 해군 지휘부는 수병들의 ‘파업’보다는 아예 ‘반란’이 낫다고 여겼는지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영국사도 이를 ‘인버고든 뮤터니(Invergordon Mutiny)’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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