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의 쪽박…영국 밑으로

1698년7월14일 에든버러 북부 라스항. 개척민 1,200명을 태운 범선 5척이 닻을 올렸다. 4개월 항해 끝에 도달한 목적지는 다리엔(Darien). 요즘의 파나마 지역인 다리엔에 도착한 스코틀랜드인들은 뉴 에든버러 건설에 착수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과 자금 부족 탓이다. 1차 탐험대의 개척민 중에서 생환자는 300명에 그쳤다. 이듬해인 1699년 출항한 2차 탐험대에도 지원자 1,000명이 몰렸으나 결과는 같았다.

소규모 탐험대까지 합쳐 다리엔을 찾았던 스코틀랜드인들은 모두 2,500여명. 신대륙 개척과 정착을 꿈꿨지만 불과 수백명만 살아서 돌아왔다. 스코틀랜드인들은 왜 무수한 희생자를 내면서 중미의 거친 땅을 찾아갔을까. 돈과 위신 때문이다. 숙적인 잉글랜드처럼 식민지를 건설해 국가적 부를 쌓겠다는 꿈이 있었다.

문제는 온 백성이 투자 대열에 나섰다는 점. 사업과 무역으로 성공해 잉글랜드은행 설립에도 참여했던 윌리엄 패터슨이 기획한 ‘다리엔 계획(Darien Scheme)’은 스코틀랜드인들에게 한 몫 잡을 수 있다는 기대심리를 불어넣었다. 금융사가인 에드워드 챈들러는 역저 ‘금융투기의 역사’에서 당시의 투자 열기를 이렇게 전한다. ‘독립을 위한 열정도 다리엔의 주식청약에 몰려든 열기만은 못했다. 젊은 여성들은 그 회사의 주식을 잡기 위해 몇 푼 안되는 재산을 털었고, 과부는 과부연금을 해약했다.’

‘다리엔 계획’의 목표는 중개 무역국가로의 도약. 파나마 부근 지역에 거대한 물류 집산지를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운하를 뚫어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스코틀랜드인들은 다리엔 계획을 잉글랜드에 맞설 수 있는 국가적 사업이라고 여겼다. 반(反) 잉글랜드 감정이 섞인 투자 열기에 휩싸인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4년간 지속된 흉작으로 극도로 궁핍한 가운데에서도 다리엔 계획에 30만 파운드를 몰아주었다.

스코틀랜드의 식민지 건설계획은 터무니없는 게 아니었는지 런던과 네덜란드, 함부르크 등에서도 투자자가 나왔다. 해외에서 모은 자금이 약 20만 파운드.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의 국제적 주식 유동화에 해당되는 스코틀랜드의 해외투자는 시운(時運)을 못 탔다. 마침 영국과 스페인간 전쟁 기운이 일면서 국제무역이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사업 전망이 불투명한데도 스코틀랜드인들은 또 다시 거국적으로 돈을 모았다.

잉글랜드가 동인도회사의 독점권 붕괴를 우려해 사업에서 발을 뺀다는 소문이 돌자 스코틀랜드인들은 있는 돈 없는 돈을 긁어모아 사업 자금을 댔으나 결과는 마찬가지. 실패였다. 스코틀랜드는 파산 위기에 빠졌다. 국부의 절반 가량을 단일 사업에 쏟아부어 실패한 스코틀랜드의 선택은 통합. 부유한 잉글랜드에 기대어 해외에 진출하고 나라 빚도 청산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투자 실패가 합병을 추진한 셈이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의회와 1705년부터 협상에 들어갔다. 1706년 양국 의회가 마련한 통합조약의 25개 조항 가운데 15개 조항이 채무 변제와 경제 지원 관련 조항일 정도로 스코틀랜드의 경제사정이 나빴다. 1706년 11월 부쳐진 표결은 116대 83로 부결. 여전히 반잉글랜드 정서가 우세했다. 그러나 불과 두달 후인 1707년 1월 표결에서는 결과가 뒤집어졌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적극적인 개입과 설득에 힘입어 통합법안이 110 대 69로 통과됐다. 통합법 14조에는 스코틀랜드의 채무 39만8,085파운드를 영국이 변제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통합은 시저의 브리튼 침공(BC 49~44) 이래 잉글랜드의 오랜 염원이었다.* 통합을 앞두고 잉글랜드가 거액을 들여 스코틀랜드 의회 의원들을 매수하려 한 흔적도 없지 않다. 통합 직후 잉글랜드 총리 로버트 할리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여론을 조사하라는 명을 받았던 밀정 대니얼 디포(Daniel Defoe)는 “스코틀랜드인 100명 가운데 잉글랜드와 통합에 호의를 품은 자는 단 한 명에 불과하며 나머지 99명은 반대”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디포의 판단대로 스코틀랜드 민중의 정서는 반잉글랜드가 강했다. **

영국은 통합으로 채무를 떠안는 대신 든든한 안보를 보장받았다. 북방의 골칫거리를 끌어안아 국경 분쟁과 전쟁 위험이 원천적으로 봉쇄됐다. 물론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이 없지 않았다. 1715년과 1745년 두 차례 자코베이트 반란이 일어났지만 스코틀랜드 출신인 스튜어트 왕조를 대신해 들어선 독일계 하노버왕조의 왕위계승에 대한 불만이었을 뿐 아니라 규모도 크지 않았다. 오히려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를 날개 삼아 브리튼 제국의 일원으로 세계를 향해 뻗어나갔다.

스코틀랜드가 대영제국의 확장에 얼마나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는지는 숫자가 말해준다. 법조계나 군대, 동인도회사 등에 진출한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나 웨일즈인과 비교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했다. 이영석 광주여대 교수의 ‘역사가가 그린 근대의 표정’(2003)에 따르면 1775년 이후 벵골(인도 지역)에 파견된 249명의 관리 가운데 47%가 스코틀랜드인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지원병의 20%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이뤄졌다. 이는 당시 인구 비율(잉글랜드 850만명, 스코틀랜드 130만명)을 웃도는 것이다.

무엇이 이들을 바깥으로 내보냈을까. 다리엔에 대한 열광적인 투자 수요에서 보듯이 해외진출에 대한 분출구가 필요했다. 스코틀랜드의 넘쳐나는 기업가와 기술자들 위생병과 병사들은 기술과 에너지를 잉글랜드 자본과 잉글랜드 해군의 보호 아래에서 훨씬 더 멀리까지 펼쳐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십분 활용한 것이다. 현실적으로 기득권을 갖고 있는 잉글랜드의 청년들과 달리 스코틀랜드 출신들은 브리튼섬 안에서 입신양명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다. 용맹한 기질로 유명한 고지대 출신은 육군과 해군에 입대해 군경력을 쌓았고 저지대의 교육받은 젊은이들은 동인도회사의 관리로 대거 진출했다. 해외식민지로 진출한 대영제국인 가운데 스코틀랜드 출신의 비중은 언제나 압도적이었다. 제국의 광대한 식민지가 새로운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스코틀랜드인들이 대영제국의 중추로 자리잡은 배경에는 높은 교육수준이 있다. 근대 경제학의 시조로 여겨지는 애덤 스미스를 비롯해 시인 로버트 번즈, 사상가 토마스 칼라일, 자조론의 새뮤얼 스마일스 등 스코틀랜드가 낳은 인물은 열거하기 힘들만큼 많다. 당시의 스코틀랜드의 교육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통계가 있다. 19세기 내내 학위를 소지한 브리튼의 모든 의사 가운데 무려 95%가 스코틀랜드에서 교육받았다.

교육비가 잉글랜드의 5분의 1에 불과했던 스코틀랜드의 교육수준이 그만큼 높았던 것이다. 케임브리지대학에 유학했던 애덤 스미스는 자유롭지 못하고 지적인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학풍에 적지 않게 실망했었다. 당대의 세계적 지성인으로 훗날 미국의 3대 대통령에 오른 미국의 토마스 제퍼슨이 ‘지구상의 어느 곳도 에든버러(의 교육수준)와 경쟁할 수 없다’고 단언했을 정도다. 이론이 없지 않지만 임마뉴엘 칸트도 자신의 조상이 스코틀랜드 태생의 학자라고 주장했었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파로 이름 붙여진 지식인 그룹 외에 고향의 이름을 빛낸 집단은 병사들이다. 특히 전원이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이뤄진 42보병연대를 비롯한 각급 스코티시 부대들은 1·2차 대전시 민속악기 백 파이프 연주와 함께 전통의상인 검은 치마를 입고 빗발치는 총탄에도 아랑곳없이 돌격을 감행해 독일군이 가장 두려워하는 부대라는 명성을 얻었다. 사단·여단급 부대들은 감군 추세 속에 오늘날 스코티시 연대로 축소됐으나 영국 육군의 최정예로 손꼽힌다.


브리튼의 일원으로 살면서도 스코틀랜드인들은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잉글랜드·프랑스 간 축구 국가대표전이 열리면 스코틀랜드는 프랑스를 응원할 만큼 반(反)잉글랜드 감정의 앙금이 여전히 남아 있다. 잉글랜드를 타자(他者)로 여기는 정서는 스코틀랜드 분리독립 움직임의 추동력이다. 주목할 점은 영국의 경제가 안좋으면 안좋을수록 스코틀랜드의 정체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 이후 영국의 경기가 장기침체로 접어들면서, 특히 잉글랜드에 비해 심각한 실업률도 불만이 높아지며 분리독립론에 힘이 붙었다. 1984~1988년 영국 전체 산업 분야의 고용은 2.9% 증가했으나 스코틀랜드는 무려 11.9%나 줄어들었다. 1707년의 통합이 다리엔 지역에 대한 투자 실패에서 비롯됐듯이 분리주의 운동 역시 경제적 박탈감과 함께 높아지고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한 국민투표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차이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스코틀랜드에서는 EU 잔류를 희망하는 비율이 63%로 가장 높았다. 국민투표 이후 실시된 각종 언론의 설문조사에서 스코틀랜드인들은 ‘브리튼의 일원보다 유럽인으로 살겠다’라는 응답 비율이 60% 안팎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 이 순간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투표를 실시하면 잉글랜드와 갈라질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스코틀랜드가 분리 독립한다면 그 파장은 결코 적지 않을 전망이다. 18세기 이후 세계사를 선도했던 대영제국의 시대가 확실하게 저문다는 역사적 의미 이외에도 주요국의 소수민족 또는 특정지역에서 분리독립을 부채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영국에서 스코틀랜드에 이어 북아일랜드가 독립을 요구하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벨기에 북부의 부유한 지역으로 스코틀랜드를 웃도는 인구(600만명)를 가진 플랑드르, 스페인의 카탈루나 지방,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등도 분리독립 운동의 열기가 식지 않는 곳이다. 심지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프랑스 북부, 네덜란드 남부, 벨기에 북부에 산재한 켈트족을 묶어 범 켈트 문화권을 형성하자는 논의도 나오고 있다.

이탈리아 국부가 몰려 있는 북부 파다니아지역이 가난한 남부와 분리를 희망하고 나폴레옹의 고향인 코르시카에서도 프랑스로부터의 분리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각 지역의 분리독립 운동을 자극해 유럽의 지도가 변하는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들 지역에는 공통점이 있다. 경제난이 심화하며 분리독립론이 힘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코틀랜드 분리독립으로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들끓고 민족국가의 시대가 열린다면 한반도는 어떤 영향을 받을까. 우리 민족은 변화의 시대를 맞아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역량을 갖고 있을까.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인종적으로 같은 뿌리를 공유했었다. 원래 스페인지역에서 브리튼섬으로 이주한 원시종족인 이베리아인들을 몰아낸 켈트족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원조다. 기골이 장대하고 성질이 급하되 적응력이 뛰어났던 켈트족은 몸에 문신이나 그림을 그렸다. 기원전 325년 그리스 탐험가 피테아스(Pytheas)가 이 섬에 상륙해 ‘문신을 한 사람들이 사는 나라(Brettanika)’라고 부른 데서 브리튼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야만족의 나라로 지중해 세계에 알려졌던 브리튼 지역은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의 침공을 받아 중남부지역이 로마의 휘하로 들어갔다. 영국의 수도인 런던도 병영을 뜻하는 라틴어 론디니엄(Londinium)에서 나왔고 맨체스터나 글로세스터처럼 지명이 체스터(-chester)나 세스터(-cester)로 끝나는 도시들은 로마 정복기의 야영지(castra)가 있던 곳이다.

로마군이 세력을 떨치던 곳은 삶의 모든 양식이 로마식으로 바뀌었다. 평야와 강을 끼고 있는 지역의 유력가문부터 로마화한 반면 산악지역(웨일즈와 스코틀랜드)이나 외딴 섬(아일랜드)같이 로마군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켈트족에 의한 켈트의 문화가 그대로 남았다. 자연스레 켈트족은 갈라졌다. 로마화한 중남부지대와 켈트 문화를 보존한 지역으로 나누어진 로마 점령기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분열의 시작인 셈이다.

산악지역에 사는 거친 켈트족은 부유하고 로마화한 도시를 자주 침공해 내려왔다. 로마제국의 팽창보다 안정과 평화를 택했던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76~138)는 충돌을 피하려 거대한 장벽을 쌓았다. 서기 122년 완공된 길이 117.5㎞의 하드리아누스 장벽은 자연 경계선으로 자리 잡았다. 이어 138년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86~161)가 보다 북쪽에 길이 59㎞짜리 안토니우스 장벽을 건설해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경계가 그어졌다.

쇠약해진 로마의 잉글랜드 군단이 본국을 구원하러 떠난 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고지대 켈트족의 침공 위협에 로마문화에 젖고 피까지 섞인 잉글랜드는 서로마제국 멸망(476년) 직전 지켜주던 로마군이 떠난 안보 공백을 메우려 게르만 일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5세기 초엽부터 앵글, 색슨족 등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앵글로색슨이라는 명칭도 이때부터 생겼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확실하게 갈라졌다.

잉글랜드는 이후에도 무수한 피가 섞였다. 8세기경 1차 노르만 침공(영문학 최초의 작품인 베어울프와 세익스피어 작품의 무대가 덴마크인 이유도 노르만 정복의 영향이다)과 11세기의 2차 노르만 정복이 잇따르는 와중에서 잉글랜드의 혼혈은 더욱 심해졌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사이는 더 나빠졌다. 정복왕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 1027~1087)에 의해 두 나라가 같은 통치 밑에 들어간 적도 있으나 대개 지배하려는 잉글랜드와 여기에 저항하고 때로는 약탈에 나서는 스코틀랜드의 구도가 이어졌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은 뒤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영국왕으로서는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 국왕으로 옹립된 1603년까지 격렬한 긴장과 갈등의 연속이었다.

막상 공동국왕을 옹립하고도 두 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에서도 호전적 성향이 강하기로 유명한 고지대 부족(하이랜더)들은 잉글랜드를 약탈하려 들었다. 1642년 잉글랜드에서 시민전쟁(청교도혁명)이 발생한 이유도 스코틀랜드의 침공이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공동국왕인 찰스 1세는 의회를 무시해 무려 11년간 의회를 소집하지 않다가 스코틀랜드 군대가 침공해 들어오자 세금을 거두기 위해 의회를 소집했는데, 여기에서 진보적 의원들이 국왕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결국 찰스 1세는 목이 잘리고 영국은 공화정 시대를 맞게 됐다.

핏줄로 보자면 스코틀랜드출신이 확실한 스튜어트 가문의 국왕이 지배하는 데도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그 결과로 혁명이 발생해 공화정을 겪게 됐다는 사실은 공동국왕 정도로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와 동질감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준다. 언어도 비슷한 것 같아도 다르고 혈통적 유사성이 떨어진데다 감정까지 쌓였던 두 나라는 1707년 스코틀랜드 의회가 주도한 통합법에 따라 한 나라로 합쳐졌다. 오늘날에도 인종적 유전자는 확연히 다르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는 켈트족이 주류인 반면 잉글랜드에서 켈트 족 유전자 보유자의 비율은 14%에 불과하다.

** 소설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로만 기억되는 대니얼 디포는 복잡다단한 인생을 산 인물이다. 사업가이자 투기꾼, 파산자, 밀정이었으며 최초의 경제평론가였다. 신학을 공부했으나 사업에 나서 실패해 거액의 빚을 진 직후에는 주식과 경제에 관한 평론을 쓰며 생계를 꾸렸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의 연구논문 ‘다니엘 디포가 밟은 영국 땅과 통합 왕국의 이상’(한국 서양사 연구회, 2005년)에는 밀정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정이 나온다. 평론을 쓰면서 의회를 비판한 죄로 체포돼 방면을 조건으로 강요받은 직업이 바로 정부를 위한 밀정이었다. 스코틀랜드에 파견된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다. 디포가 정권을 홍보하려고 창간한 격일간지는 최초의 경제신문으로도 손꼽힌다. 나이 60세에 이르러서야 정치적 족쇄에서 풀려난 그는 비로소 ‘로빈슨 크루소’를 비롯한 소설 10여편을 쏟아내며 작가로서의 재능을 꽃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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