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아산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호재기자.
현대상선이 15일 현대그룹의 품을 떠나게 되면서 범(汎)현대가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현대그룹의 위상은 총자산 2조원대의 중견기업 수준으로 내려앉게 됐다. 현대그룹은 지난 1987년 대기업집단 지정 도입 당시만 해도 명실상부 재계 1위 기업이었다. 하지만 불과 30여년 사이에 창업주인 정주영 명예회장의 죽음과 ‘왕자의 난’ 등을 거치며 사실상 공중 분해됐다. 취임 이듬해인 지난 2004년 “오는 2010년까지 매출 20조원을 달성해 재계 10위권으로 도약하겠다”던 현정은(사진) 현대그룹 회장의 다짐도 결국 물거품이 됐다.
현대상선은 이날 서울 연지동 본사에서 임시 주총을 열고 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지분에 대한 7대1 차등감자 안건을 원안대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현정은 회장 및 특수관계인의 지분율은 기존 22.64%에서 3.64%로 낮아졌다. 22일 채권단의 출자전환까지 마무리되면 대주주 지분율은 0.5% 미만으로 낮아져 계열 분리 작업이 완전히 마무리된다.
현대상선과 이별 이후 현대그룹은 사실상 지주회사 격인 현대엘리베이터를 중심으로 운영된다. 현 회장 및 특수관계인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6.1%를 보유한 최대주주이며 현대엘리베이터는 대북사업을 담당하는 현대아산(67.5%)과 부동산관리업을 맡은 현대엘앤알(72.1%), 현대경제연구원(44.8%) 등을 거느리고 있다.
재계는 현대그룹의 앞날에 대해 일단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기업의 덩치는 줄었어도 수익구조는 도리어 탄탄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엘리베이터는 지난해 매출 1조3,480억원, 영업이익 1,567억원을 각각 기록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률도 10%를 넘겨 재계에서도 손에 꼽히는 알짜 기업으로 분류된다.
정보기술(IT) 서비스를 담당하는 현대유엔아이 역시 주목받는 회사다. 이 회사는 현대상선 등 물류회사에 IT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데 현대상선 계열분리 이후에도 계약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해운업계 특성상 한 번 적용한 물류 시스템을 바꾸기 쉽지 않은 탓이다. 실제로 이 회사는 해운업계 불황에도 불구하고 2010년 이후 매년 100억원 안팎의 안정적인 영업이익을 내고 있다.
문제는 역시 성장 가능성이다.
당장은 꼬박꼬박 돈을 벌어오는 탄탄한 기업으로 분류되지만 내수 시장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탓에 폭발적인 매출 확대를 기대하기 어려운 탓이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올 4월 ‘세계화 선포식’을 열고 “현재 3,000억원인 해외 매출을 2020년 9,000억원 수준으로 늘리고 해외법인 역시 매년 2개씩 확대해 총 10개를 신설하겠다”는 내용의 청사진을 내놓았지만 목표 달성 여부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이밖에 대북관계 경색으로 완전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현대아산 처리 등도 현 회장이 풀어내야 할 숙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북 사업은 현 회장의 남편인 고(故) 정몽헌 회장의 숙원이지만 북한의 연이은 도발과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한반도 배치 등의 영향으로 당분간 활로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결국 현대그룹이 덩치는 키우는 것은 현대상선을 되찾는 방법밖에 없다.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에서 재기에 성공한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이나 금호아시아나그룹을 복원한 박삼구 회장이 좋은 선례다. 재계 고위 관계자도 “현대그룹이 과거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현대상선만이라도 되찾아올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현 회장과 현대그룹은 이번 구조조정 과정에서 우선매수청구권을 확보하지 못했다. 자구노력을 이행하면서 현대증권과 같은 알토란 같은 자산들을 모두 팔아 추후 현대상선이 매물로 나왔을 때 살 수 있는 여력도 그리 없다.
무엇보다 현대상선 구조조정 과정에서 현 회장 스스로가 리더십에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다. 결국 실지(失地) 회복은 범현대가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는가에 달려 있는데 과거 현대건설 등의 입찰 과정 등을 보면 이 또한 그리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서일범기자 squiz@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