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생 벤처 기업과 벤처캐피털 업체들이 모여들면서 벤처 업계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서울 강남 테헤란로 모습. /서울경제DB
A벤처캐피털 대표는 최근 투자할 업체를 물색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다. 2~3년 전부터 결성된 펀드들을 통해 자금은 많은데 마땅히 투자할 업체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5년 전만 해도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의 투자 포트폴리오 비중이 50% 가까이 됐지만 최근에는 10%대로 뚝 떨어졌다. 그나마 최근 상승세를 보이는 바이오와 화장품 분야의 투자를 늘리고 있지만 ICT 분야를 대체하기에는 아직 규모가 작다. 또 최근에 나오는 증강현실(AR)과 자율주행차량 등 신산업 관련 기술을 보유한 국내 벤처기업이 많지 않아 신산업에 대한 투자를 늘리기에는 손실 부담이 너무 크다. A업체 대표는 “이 업종, 저 업종을 뒤져봐도 투자해 이익을 낼 자신이 없다”며 “이 때문에 국내 말고 해외 쪽 투자도 활발하게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정부를 중심으로 벤처 생태계 조성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벤처 업계로 투자자금이 몰려들고 있지만 마땅한 투자 대상이 없어 벤처캐피털 업계가 애를 먹고 있다. 우리나라 벤처 생태계에서 주축을 이뤘던 주력 산업들이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새로운 산업군의 성장은 느린 추세가 이어지면서 대규모 자금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벤처투자 업계에서는 이 같은 추세가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전통적으로 벤처 투자를 많이 받았던 ICT나 제조업 분야의 동력이 떨어지고 새롭게 성장하는 인공지능과 증강현실(AR) 등의 새로운 산업군은 성장 속도가 느려졌기 때문이다. 한 벤처캐피털 업체 대표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그나마 괜찮았던 ICT와 제조업 등 하드웨어 분야가 최근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AR 등 새로운 산업군의 성장세가 주춤해지면서 투자 환경이 녹록지 않다”며 “우리나라 ICT와 제조업이 하반기 갑자기 살아날 가능성이 낮다고 보면 이러한 추세는 더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통계적 착시현상도 이 같은 괴리를 키우는 데 한몫하고 있다. 모태펀드 등 정책성 출자자들과 금융기관 등 민간 출자자들이 펀드를 결성한다고 하면 실제로 6~7개월 뒤 벤처캐피털에 자금이 들어오고 그때부터 투자 집행을 시작한다. 펀드를 조성한 시점에 펀드에 유입될 자금 규모가 커져도 실제로 벤처캐피털을 거쳐 벤처 업체로 자금이 유입되는 데 그만큼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말부터 민간 자금이 대거 유입되며 벤처 펀드 규모가 커지고 있지만 벤처 펀드 운용사들의 투자는 위축돼 벤처 업체들은 오히려 투자자금을 받기가 더 어려워졌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자금줄이 마르는데 통계적으로는 벤처 생태계에 막대한 자금이 유입되는 것처럼 보이는 셈이다.
정부는 상황이 이런데도 펀드 결성액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는 점만 강조하며 낙관적 전망만 하고 있다. 이날 중소기업청이 발표한 보도자료의 제목도 ‘상반기 벤처펀드 결성액, 사상 최고치 기록’이었다. 또 앞으로 벤처펀드 결성 규모 증가, 하반기 추가 펀드 결성 계획 등 투자 여력이 충분하다며 하반기에는 벤처 투자가 긍정적으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펀드 규모가 커진다고 그 돈이 반드시 벤처 업체로 투자되는 것은 아닌데도 펀드 규모가 늘어나 벤처 투자도 늘어날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중기청 관계자는 “벤처 투자의 경우 기존 6,000억원대 투자 규모가 지난해 9,000억원대로 급격히 늘어나 기저효과로 소폭 감소했고 중국과 미국 등 세계적인 추세를 봐도 올해는 전반적으로 줄어든 측면이 있다”면서 “매년 펀드 결성 규모가 역대 최고치로 늘어나고 신설 법인도 늘어나 하반기는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벤처캐피털이 지금보다 모험적이고 선제적인 투자를 해야 하고 정부는 새로운 산업군을 키우기 위한 지원 정책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세종 중소기업연구원장은 “경기가 나빠지니까 벤처캐피털이 너무 안전한 투자로 가려는 경향이 있는데 아직은 산업이 미흡하지만 선제적으로 새로운 산업군에 대한 투자를 늘려야 한다”며 “정부 역시 새로운 산업군에 투자할 만한 업체들이 늘어나도록 유도하는 게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강광우기자 pressk@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