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성장을 이어온 우리 경제의 힘은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이었다. R&D 분야에 집중했던 것 역시 이 때문이었다. 제조업체들은 해외의 우수한 기술을 가져와 우리 것으로 단기간에 만들어 성과를 냈다. 1980년대 전자교환기나 D램, 1990년대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액정표시장치(LCD) 등 해외의 우수한 기술을 따라잡기 위해 R&D에 집중했고 제조업은 세계적인 수준에까지 올라섰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규모가 되면서 그동안의 빠른 추격자 전략은 먹혀들지 않고 있다. 사실상 더 이상 모방할 대상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선도자(first mover)가 되면서 R&D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기업들의 R&D 투자에 최근 이상 징후가 포착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지난해 30대 그룹의 R&D 비용은 31조7,000억원이었다. 2014년(32조2,000억원)보다 5,000억원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R&D 투자 금액은 매년 두자릿수의 증가율을 기록해왔는데 2010년 이후 처음으로 감소한 것이다. 올해 역시 사정이 썩 좋지 않다. 올해 30대 그룹의 R&D 투자 예상액도 지난해보다 0.3% 증가한 31조8,000억원에 그쳤다.
국내 기업의 R&D 투자는 글로벌 기업과 비교하면 크게 떨어진다. 글로벌 회계법인 PwC의 자료를 보면 현대·기아차의 지난해 R&D 투자 금액은 3조6,000억원으로 폭스바겐그룹의 6분의1 수준에 머물렀다. 현대차의 매출 대비 R&D 투자 비중도 2.6%로 도요타의 3.7%보다 1%포인트 이상 낮다. 일본 자동차 기업들은 더 나아가 올해 사상 최대 수준의 R&D 투자를 하겠다고 대대적으로 밝힌 바 있다.
특히 페이스북(26.5%), 구글(16.4%), 마이크로소프트(13.6%) 등 신산업 분야의 선도주자들은 R&D에 매출의 10% 이상을 투자한다. 삼성전자가 R&D 분야에 공세적으로 투자를 늘리고 있다지만 여전히 매출액 대비 R&D 투자 비율은 7%대에 머물러 있다.
전자·자동차 산업을 제외한 나머지 분야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조선·철강 등 중후장대형 산업들의 R&D 비율은 더 낮다. 세계 3대 조선업체인 삼성·현대·대우조선해양은 0.5~1.2%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구조조정 상황이어서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시황이 악화되고 있는 디스플레이 업계나 화학 업계 역시 사정이 비슷하다.
R&D 투자 금액이 줄어드는 것도 문제지만 실제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는 점 역시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03년부터 2012년까지 한국에서 발간된 과학기술 분야 논문 건수는 미국의 10분의1인 47만8,000건으로 OECD 국가 중 12위를 기록했다. 논문 인용 건수 기준 상위 10% 안에 드는 우수 논문 비중은 10편 중 1편꼴로 OECD 국가 26위 수준이었다. 많은 시간을 매달리지만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연구 성과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기업들에 R&D는 생명수와도 같은 존재이지만 막대한 비용을 장기간 투자해야 한다는 점에서 늘 고민스러운 부분이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R&D를 줄이는 것 역시 이런 이유다. 미국의 모바일용 반도체 업체인 퀄컴이 실적과 상관없이 매년 매출액의 20%를 R&D에 꾸준히 투자하고 다국적 제조업체 GE가 2008년 금융위기 때 연간 10억달러의 인재 교육 예산을 투입한 과감한 정책을 우리 기업들은 하지 못하고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빠른 추격자였던 우리 기업들이 선도자 위치에 서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이로 인해 어떤 것을 연구해야 할지 탄착점을 제대로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여기에 불황까지 더해진 것이 R&D 이상 징후의 이유”라고 분석했다.
정부는 올해 5월 R&D 혁신방안을 통해 기존 R&D 체계를 대대적으로 수술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R&D 시스템을 혁신하고 신성장동력 R&D 투자 금액의 세제 혜택을 2~3% 수준에서 최대 17~18%까지 높이겠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대책이 도움은 되겠지만 큰 변화를 위해서는 너무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매년 새롭게 나오는 관련 대책이 자리 잡기도 전에 또 새로운 대책을 내놓는 것 역시 문제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정부는 지난해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R&D 혁신방안’을 확정해 발표한 바 있다. 올해 대책과 내용은 조금 차이는 있지만 R&D의 실효성을 높이겠다는 게 핵심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명박(MB) 정부 당시 R&D 컨트롤타워였던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사라졌다가 이번 정부 들어 과학기술정책원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등 근시안적 정책이 기업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며 “장기적 관점에서의 꾸준한 집중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강도원기자 theone@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