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뜨자 가마를 타고 천일대에 올랐다. 정양사 바로 앞 산기슭이었다. 이때 마침 흰 구름이 피어올라 수많은 골짜기를 뒤덮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얇은 비단 같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금세 접혔다 펴졌다 하는 것이 변화무쌍했다.…한참을 앉아 있다 보니 흰구름이 깨끗하게 다 사라지고 세상에서 일컫던 바로 그 일만 이천 봉우리가 마치 손바닥 안에 든 것처럼 하나하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전체가 백옥처럼 희고 깨끗하며 그 정교함은 손으로 새긴 듯하고 속된 기운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었으며, 또한 어리석거나 고집스러운 빛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238~239쪽)
조선의 선비 김창협은 금강산 유람 후 동해로 향했고 옹천에 올라 일출을 감상했다. 그림은 겸재 정선의 ‘신묘년풍악도첩’ 중 ‘옹천’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제공=돌베개
금강산 천일대에 오른 선비 김창협은 격한 감동을 애써 누르며 손에 잡힐 듯 세세하게 풍경을 묘사했다. 그가 1671년 8월11일에 출발해 9월11일에 돌아오기까지 꼬박 한달간 금강산과 동해를 유람하고 ‘동유기(東遊記)’라는 제목의 이 기행문을 썼을 당시 나이는 불과 21세였다. 천혜의 절경을 앞에 두고도 ‘헐~’ ‘짱!’ 등 탄식처럼 짧은 음절로 감상을 뭉뚱그리고 정성스런 묘사는 사진으로 대신해 버리는 요즘 SNS 세대와는 사뭇 다르다.
신재 주세붕, 퇴계 이황을 비롯해 ‘어우야담’의 유몽인, 정조의 개혁을 보필한 재상 채제공 등 조선의 선비들이 팔도의 명산 20곳을 유람한 기록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 교통이 수월하지 않았고 사회·신분적 제약이 상당했던 조선 시대에는 산을 유람하는 게 쉽지 않았고 대신 이처럼 다른 사람의 여행기를 읽으며 방 안에 누워 즐기는 와유록(臥遊錄)의 전통이 있었다. 조선 선비에게 산수기행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는 공자의 ‘요산요수(樂山樂水)’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었고, 이를 기록한 기행문은 자연에서 배운 선비의 깨달음과 식견을 풀어내는 자리였다.
금강산을 여행하던 김창협의 경우 이틀을 내리쏟아지던 비가 갠 틈에 구연동으로 들어갔다 불어난 시냇물을 보고는 “지난번에는 바위를 만나면 겸손하게 피해 가던 물이 오늘은 튀어 올랐고, 지난번에는 거문고와 피리 소리를 내더니 오늘은 변해서 몽땅 우레와 북소리를 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마다 모두 기이하고 장엄하여 마음조차 마구 흥분되는 것이 엊그제와 같지 않으니,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 주위의 처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가 보다”고 고백했다. 남원의 수령으로 있으며 지금의 지리산인 두류산을 유람한 유몽인은 “만일 인간 세상의 영화를 다 마다하고 영영 떠나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한다면 오직 이 두류산만이 은거하기에 좋을 것이다. 이제 돈과 곡식과 갑옷과 무기와 같은 세상 것들에 대해 깊이 알아 가는 것은 머리 허연 이 서생이 다룰 바는 아니리라. 조만간에 이 벼슬 끈을 풀어버리고 내가 생각한 애초의 일을 이룰 것이다”고 털어놓았다. 한라산을 다녀온 최익현은 ‘유한라산기’에서 “산세가 …마치 내리 달리는듯한 것은 말과 비슷하고, 높은 바위와 층층의 절벽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공손히 절하는 듯한 것은 부처와 같다. 평평하고 넓으며 멀리 흩어져 활짝 핀 듯한 것은 곡식과 닮았고, 북쪽을 향해 곱게 껴안은 듯한 수려한 자태는 꼭 사람처럼 보인다”며 “이 때문에 말은 동쪽에서 나고, 절은 남쪽에 모여 있으며, 곡식은 서쪽에서 자라기에 적절하고, 뛰어난 사람은 북쪽에서 많이 난다고 한다”며 자연을 미루어 사회상을 가늠했다.
책을 읽노라니 덩달아 선비가 되는 듯하다. 어려운 옛글을 공들여 풀어 쓴 전송열과 허경진은 기행의 계절 순으로 목차를 배치하고, 조선 영조 때 제작된 ‘해동지도’를 도판으로 사용해 독자를 배려했다.1만8,000원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