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분오열된 나라. 1950년대 초 이란의 모습이다. 유약한 젊은 국왕은 의회에 휘둘렸다. 의회권력과 정치권 지도 역시 복잡했다. 구 왕조 출신의 귀족과 대부족장, 공화주의자와 이슬람 근본주의자, 공산주의자와 군대의 생각과 지향점이 제각각이었으니까.
분열된 국민을 단합시킬 수 있는 요인은 딱 하나. 반영(反英) 감정이었다. 영국은 이란을 유린하고 지배, 착취하는 악마로 여겨졌다. 정치인들은 어떤 정파든 상대를 공격할 때면 ‘영국의 첩자’라고 몰아세웠다. 석유의 역사를 다룬 대작 ‘황금의 샘(원제 The Prize)’을 지은 다니엘 예긴에 따르면 이란만큼 영국에 대한 증오가 심한 나라는 일찍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경제적 수탈이 심했던 탓이다. 식민지로 전락한 적은 없었으나 19세기 초 이후 이란은 영국에게 끊임없이 이권을 빼앗겨 왔다. 로이터통신의 창업자인 폴 로이터가 1872년 광물 채굴권과 철도·운하 건설권을 따낸 게 시초. 마침 영국과 세력 다툼을 벌이던 러시아의 견제로 로이터의 이권은 실행되지 않았으나 20년 뒤인 1892년 이란인들을 분노하게 만든 사건이 일어났다. 왕실이 영국에 담배 전매권을 넘긴 것. 바로 금연 및 영국산 보이코트 운동이 전국으로 번졌다. 이란판 물산장려운동의 과녁에 영국이 있었던 셈이다.
석유 이권도 마찬가지. 광물 탐사권을 헐값에 사들인 영국 자본은 1908년 페르시아 남부에서 중동 지역 최초의 유전을 발견*했으나 이익은 영국인들이 고스란히 가져갔다. 순이익의 16%만 왕족에게 돌아갔을 뿐이다. 페르시아를 아예 보호령으로 삼으려는 영국에 맞서 레자 칸 장군이 1925년 쿠데타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이란으로 바꾼 뒤에도 상황은 나아진 게 없었다. 영국은 석유 이권을 독점하며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결정적으로 세계 2차대전 초반인 1941년 가을, 영국과 소련의 유전 점령이 이란 민중의 분노를 불렀다. 영국과 소련은 독일이 유전을 확보하기 위해 침공할 우려가 있다며 중립국이던 이란의 유전을 점령해버렸다. 1944년에는 고분고분하지 않은 국왕(레자 칸 장군)을 퇴위시키고 아들인 팔레비를 새로운 국왕으로 앉혀 꼭두각시처럼 부렸다.
영국군 7만명과 소련군 10만명이 눌러 앉은 대가는 컸다. 무엇보다 식량을 징발해가는 통에 만 명 이상의 이란 국민이 굶어 죽었다. 겨울철 난방용 석유도 빼앗겨 얼어 죽은 사람도 수천명에 이르렀다. 영국인에 대한 감정은 더욱 나빠졌다. 이란 정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영국과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 고문단을 미국에 요청하는 정도였다. 산유국 이란의 가치를 눈 여겨 본 미국은 1942년 군사고문단을 보내 6년간 이란 군과 경찰을 가르쳤다.
전쟁이 끝난 뒤, 1946년 영국과 소련의 군대는 철수했으나 대영 감정은 더욱 나빠졌다. 영국이 1933년 개정된 이익배분 비율 20%를 멋대로 어기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애초의 지분인 16% 마저 밑돈다고 주장했다. 앵글로이란석유회사(AIOC)가 이란에 주는 이익 배분액보다 영국 정부에 납부하는 세금이 더 많다는 사실은 이란 국민들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반영(反英) 분위기 속에 이란의 일부 정치권은 대담하게 ‘계약 파기 및 석유자원 국유화’를 주창하고 나섰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를 상실하고 인도까지 독립한 터에 중동의 석유 이권까지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한 영국은 이런 움직임에 냉소를 보냈다. 영국의 입장에 조금이라도 동조하는 이란 정치인들은 테러를 당했다. 존경받는 군인으로 육군 참모총장 출신인 라즈라마 총리는 ‘국유화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발언한 직후 ‘영국의 하수인을 사살하라는 신성한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이슬람 교도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장관과 국회의원들에 대한 암살이 잇따르는 가운데 이란에서는 정치적 변혁이 일어났다.
석유 자원 완전 국유화를 주장한 모사데크가 1951년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 자리에 오른 것이다. 모사데크(당시 70세)는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프랑스와 스위스에 유학한 법학박사로 국제정세에 밝았다. 구 왕조의 왕족 출신이라는 점도 그의 존재감을 빛나게 만들었다. 팔레비 국왕의 부친이 일으킨 쿠데타로 쫓겨난 카자흐 왕조의 직계 증손자이면서도 공화정치로 이란을 선진화하겠다는 모사데크에게 이란 국민들은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영국은 강경파 민족주의자 모사데크의 등장에 겁 먹었는지 지분을 대폭 양보할 의사가 있다는 뜻을 비쳤다. 그러나 때가 늦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1950년 말 미국과 비밀리에 맺은 이익반분협정의 내용이 이미 이란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익반분협정이란 말 그대로 산유국과 석유회사가 이익을 절반씩 나누자는 것. 산유국 몫이 15~35% 수준이던 당시 상황에서 이익반분협정은 파격적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치밀한 자료 준비로 미국 석유 메이저인 아람코사의 양보를 얻어냈다.
아람코사의 순익은 이익반분협정 뒤에도 감소하지 않았다. 미국 정부가 수입 원유에 부과하던 관세를 아예 면제해 준 덕분이다. 의회에서 문제 삼자 미국 국무부는 “석유회사에게 받을 세금을 산유국에 내주는 게 공산화를 막기 위한 원조보다 경제적”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여서 미국 정부의 설득 논리는 쉽게 먹혔다.
이란에서 쫓겨나게 생긴 영국도 비슷한 논리를 내세웠다. ‘직접적인 군사개입을 통해 공산주의 성향이 강한 모사데크를 제거해야 한다’고 미국을 설득한 것.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출신 성분과 경력, 재산을 감안할 때 모사데크가 공산주의자일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오히려 모사데크가 사라지면 공산주의자들이 득세할 우려가 있다’는 입장이었다.
영국은 미국에 매달렸다. 도럴드 퍼거슨 에너지부 장관은 미국을 향해 ‘공산주의로부터 이란을 방어하기 위해 모사데크를 내버려둬야 한다는 미국의 의견이 맞다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미국은 선택해야 한다. 페르시아를 구할 것인가, 영국을 괴멸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강짜를 부렸다. 다소 유화적인 노동당내각이 선거에서 지고 보수당의 승리로 총리직을 다시 맡게 된 윈스턴 처칠은 “이란을 내주면 수에즈 운하까지 잃게 된다”며 배수진을 쳤다.
이란은 이란대로 고통을 겪었다. 한국전쟁 특수로 원유 사용이 많아지는데도 영국의 아바단 항구 봉쇄로 기름을 수출할 수 없었던 탓이다. 1950년 일일 66만 배럴 이상이던 이란의 원유 생산은 2만 배럴 이하로 줄어들었다. 반면 세계의 일일 원유생산은 같은 기간 중 1,090만 배럴에서 1,300만 배럴로 늘었다. 2년간 석유판매대금이 한 푼도 들어오지 않자 이란 경제는 극도로 나빠졌다. 국민들은 생활고에 찌들고 물가는 치솟았다. 치안도 악화돼 수도인 테헤란시 경찰국장이 납치, 살해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탈출구를 찾으려는 모사데크가 소련과 접촉한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워싱턴도 바빠졌다. 대통령도 민주당 트루먼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섰던 아이젠하워로 바뀐 터. ‘이란이 공산화하면 중동 국가들도 도미노처럼 무너질 수 있다’는 영국의 논리가 군인 출신인 아이젠하워에게 먹혀 들어갔다. 결국 미국과 영국은 모사데크 총리를 몰아내기로 뜻을 모았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모사데크 제거를 위해 이란 군부를 동원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계획의 암호명이 바로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 영국 정보부 MI-6는 이란 쿠데타에 ‘부츠 작전(Operation Boot)’이라는 암호명을 붙였다. 막상 8월15일부터 시작된 반정부 시위와 쿠데타는 실패로 보였다. 모사데크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예상보다 훨씬 탄탄했기 때문이다. 미국과 영국의 부추김에 친위 쿠데타를 지시한 국왕 팔레비는 돈도 측근도 없이 다급하게 로마로 도망쳤다. 1953년8월18일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쿠데타 성공 가능성 희박’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같은 날 밤 이란의 수도 테헤란. CIA와 MI-6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돈을 풀어 시위대를 구성한 것. 근육질의 레슬링·역도 선수들이 선두를 맡았다. 석유수출 봉쇄로 인한 경제난에 불만이 높아지던 상황. 시위가 거세지고 친정부·반정부 시위대간 충돌로 사망자가 발생한 뒤 미국제 M-4 셔먼 전차 36대를 동원한 군대가 출동하자 상황은 뒤집혔다. CIA는 바로 전문을 올렸다. ‘아작스 작전 성공!’
모사데크는 체포돼 3년 형을 살았다. 출감 후에는 고향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여생(1967년 85세로 사망)을 마쳤다. 민족주의자 모사데크를 끌어내린 뒤에는 잔치가 벌어졌다. 1954년 미국과 영국은 이란 석유를 놓고 새로운 콘소시엄을 만들었다. 소유권은 이란이 가지되 지분은 100% 서방 석유메이저들이 분점하는 이상한 구조였다. 영국의 지분은 40%로 줄고 영국·네덜란드합작사 14%, 프랑스국영석유회사가 6%, 미국계 5대 정유사가 각각 8%씩(미국 지분 40%) 지분을 쪼갰다. 최대 승자는 미국이었다. 이 순간을 기점으로 중동 석유의 주도권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넘겨졌다. 이란의 몫은 순이익의 40%. 이미 4년 전에 사우디아라비아가 50:50의 이익반분협정을 맺은 이후 대부분의 산유국이 절반 이상의 이익을 가져가는 시대에서 불공정한 배분구조였다.
아직스 작전이 성공하는 데 실무를 맡았던 주요 인물이 둘 있다. CIA 작전 책임자의 이름은 커밋 루스벨트 2세(당시 47세·Kermit Roosevelt, Jr.). 26대 미국 대통령을 지내며 해군 군비 확장을 통한 대외 팽창전략을 펼쳤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자인 그는 아작스 작전을 성공시킨 공로로 국가 안보메달까지 받았다.
다른 주역은 노먼 슈워츠코프(당시 58세·Norman Schwarzkopf, Sr) 장군. 1942년 대령 계급장을 달고 테헤란의 미국 군사고문단장을 맡았던 사람이다. 웨스트포인트 출신인 슈워츠코프는 1차대전에 참전해 24세에 대령까지 진급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야전 지휘관은 더 이상 맡지 못했었다. 독일계라는 이유에서다. 대대장 이상은 오르지 못하고 헌병대에 근무하던 그는 종전 후 경찰로 변신, 신설 뉴저지 주립경찰청장 자리를 15년간 지켰다.
알코올 중독이었던 부인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일에 파묻혔던 그는 2차대전이 터지자 재입대, 1942년부터 6년간 이란의 군과 경찰을 훈련시켰다. 준장 승진 이후 독일 주둔 미군의 헌병참모로 근무하던 그는 아작스 작전에서 소장 계급장을 달고 테헤란에 다시 나타났다. 그가 가르친 군대와 경찰은 쿠데타의 주역을 맡았다. 쿠데타로 강력한 왕권을 다진 팔레비 국왕은 그에게 비밀경찰 창설과 교육이라는 새로운 임무를 맡겼다. 팔레비의 철권통치를 뒷받침하며 악명을 떨쳤던 이란 비밀경찰 사바크의 산파가 바로 슈워츠코프다. 슈워츠코프라는 이름의 장군은 1991년에도 중동에 나타났다. 1차 걸프전쟁에서 미군을 지휘한 노먼 슈워츠코프 주니어 대장이 그의 늦둥이 외아들이다.
선거로 뽑힌 정부를 뒤집은 아작스 작전은 과연 성공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이란의 석유 국유화를 막고 미국과 영국은 석유 이권을 찾았으니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다만 긴 호흡으로 보자면 성공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란의 민족주의가 강대국의 개입에 좌절되는 현상을 지켜본 아랍권에서는 민족주의 열풍이 불었다. 이집트와 이라크, 리비아에서 자유장교단 청년장교들은 쿠데타로 민족주의 군사정권을 잇따라 세웠다.
아작스 작전의 최대 수혜자인 팔레비 국왕도 1979년 이란회교 혁명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호메이니를 정신적 지주로 삼은 당시 이란 혁명에서 시위 군중들은 모사데크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그의 이름을 외쳤었다. 아작스 작전의 생명은 26년 밖에 지속하지 못한 꼴이다. 오히려 아작스 작전이 내뿜는 독성의 반감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다. 이란 회교혁명 직후 미국은 혁명의 파급을 막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이란에 대한 대항마로 지목한 게 이라크의 후세인. 미국의 부추김은 8년간의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 과정에서 독재 체제를 강화한 후세인이 미국의 우방인 이슬람 왕조국가들과 대립하자 미국은 이라크와 두 차례 걸프전을 치렀다.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궤멸됐으나 과연 그럴까.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는 IS(이슬람 국가) 군대의 장교 가운데 절반 이상이 구 이라크군 출신이라는 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역사의 악순환을 말해준다.
미국은 2000년 3월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1953년의 이란정권 전복과 후세인 지원은 실수였다’고 인정했지만 잘못 끼운 단추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CIA도 아작스 작전 60주년을 맞은 지난 2013년, 작전 개요와 이란 군경에 대한 뇌물 일부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미국과 이란은 오랜 적대관계를 극복해 나가고 있다. 팔레비 시절 제공한 원자로**가 이란 핵 개발이라는 부메랑으로 되돌아오는 사태도 합의로 해결했으니 국제관계란 참으로 모를 일이다.
아작스 작전 63주년, 말 장난 같은 의문이 남는다. 아작스 작전이 아작 낸 것은 앵글로 색슨에게 적대적인 이란이었을까, 아니면 종파(宗派)간 반목이 담긴 유리 판도라 상자였을까. 확실한 사실은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죽어야 중동의 평화가 찾아올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작스 작전의 직접적인 희생자만 250여명. 이란-이라크 전쟁과 두 차례의 걸프전에 IS의 테러의 사상자와 그 가족까지 합치면 피해자는 수백만명에 이른다. 어디 이뿐이랴. 지중해에서 차디찬 주검으로 발견된 세살바기 아기 아일란 쿠르디를 비롯한 중동 난민들의 비극과 테러 위기에 떠는 지구촌의 현실도 영국과 미국의 잘못된 중동정책으로 깊어진 증오 탓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영국이 페르시아에서 중동 최초의 유전을 발견한 사연은 극적 요소로 가득하다. 먼저 협상을 시작한 곳은 프랑스. 나폴레옹 시대부터 프랑스의 구애를 받았던 페르시아가 채굴권 계약 직전에 영국을 선택한 데에는 국제적 거물 스파이 시드니 라일리(Sidney Reilly)의 개입이 있었다. 라일리는 보어전쟁과 러일전쟁, 레닌 암살미수 사건에 개입했던 인물. 소련 당국에 체포돼 생을 마친 영국과 독일, 일본의 3중 스파이였다는 의심도 샀었다. 소설 ‘007’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원형 모델로도 유명하다.
라일리의 공작으로 페르시아의 석유 채굴권을 갖게 된 영국 모험 자본가들은 7년간 탐사와 채굴 끝에 포기하려던 순간 대형 유전을 발견했다. 마침 영국 해군이 함정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하기 위해 안정적 원유공급원을 찾던 시기였다. 영국 정부가 급히 나서 노새 6,000마리를 동원해 사막을 가로지르는 222㎞의 파이프라인을 깔았다. 아바단의 현대식 항구와 정유공장도 이때 들어섰다. 영국 자본가들은 이때 순이익의 16%를 페르시아 국왕에게 지불하는 대가로 60년간 채굴권을 가져갔다.
** 미국은 팔레비 국왕 시절 이란에게 원자로 뿐 아니라 최신 무기를 주저하지 않고 팔았다. 이란군 장교가 미국제 M-60 중전차를 몰고 소련으로 망명하는 사건이 일어나도 최신예 무기 공급은 멈추지 않았다.(미국은 M-60 전차의 판매를 승인해 달라는 한국에게는 구형 M-48 전차의 기동력과 화력을 업그레이드하는 키트를 팔았을 뿐이다.) 유럽은 물론 이스라엘에게도 판매하지 않았던 고성능 F-14 톰캣 전투기도 이란에는 넘겼다. 회교혁명 이후 부품 공급이 끊긴 상태에서도 이란 공군의 F-14 전투기는 이라크와 전쟁에서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다. 제공전투기로서 이라크 공군을 압도했을 뿐 아니라 고성능의 레이더를 이용해 공중통제기로도 쓰였다. 미국은 유지 비용이 많이 드는 F-14 전투기를 퇴역시키면서 예비용으로 보관하지 않고 아예 파괴했다. 주요 부품이 이란에 유출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서다. 미국 역시 아작스 작전의 피해를 입은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영국, 앵글로 색슨 국가의 중동정책은 여전하다. 근본적으로 바뀐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