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오바마 레거시와 한미 FTA

손철 뉴욕특파원

손철 뉴욕 특파원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린 필라델피아 웰스파고센터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섰다. 타고난 무대 체질인 그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를 격찬한 후 아내인 미셸 여사를 가리키며 12년 전 첫 전당대회 때에 비해 “하루도 늙지 않았다”며 애정을 표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그러면서 “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덧붙여 대회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흑인 최초로 백악관의 키를 쥘 당시 오바마의 나이는 47세. ‘검은 케네디’로 불릴 만큼 젊고 잘 생긴 정치인이었지만 백악관 생활 8년이 지난 현재 그런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는 것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 미국민들도 주름 많아진 오바마의 얼굴과 늘어난 흰머리를 보면서 고단한 대통령의 업무와 그의 헌신을 직감적으로 이해하는 듯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 첫해인 2008년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를 수습하며 선진국 중 가장 먼저 미국의 경제 회복을 이끈 것이나 세계 도처의 테러와 안보 위협에 대응하며 이란 핵 합의를 이끌고 쿠바와 53년 만의 국교정상화를 이뤄낸 것 등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오바마의 레거시(legacy·유산)’다. 그가 얼마 전 맞은 55세 생일에 대통령 지지도가 54%를 기록한 것에서 보듯 내치도 성공해 대선 경쟁이 한창인 요즘도 심심치 않게 ‘오바마, 4년 더’를 외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표표히 백악관을 떠나 제2의 인생을 준비하려는 오바마 대통령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것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다. TPP는 미국과 일본·멕시코·호주·베트남·칠레 등 태평양 연안에서 한국만 제외하고 주요 12개국이 맺는 거대 자유무역협정(FTA)이다. 미국 주도로 지난해 이미 협상이 타결돼 각국 의회의 비준만 남겨 둬 미 정부는 TPP를 오바마의 경제 분야 최대 유산으로 남기기 위한 마지막 작전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대선의 벽에 막혀 8년간 공들인 탑은 무너질 위기다.

지지율 하락 속에도 도널드 트럼프는 틈만 나면 오바마의 TPP를 때려 상처 입은 미 제조업과 노동자들의 울분에 기름을 부으며 반전을 모색하고 있다. 그 와중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 듯 한미FTA가 트럼프의 입길에 올라 죄인 신세가 되고 있다. 국무장관 시절 TPP를 ‘골드 스탠더드(황금 기준)’로 부르고, 오바마 레거시를 적극 계승하겠다고 선언한 클린턴이지만 최근에 “지금도, 대통령이 돼도 TPP를 반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쇠락한 공업지역인 ‘러스트벨트’가 미 대선 승부를 좌우할 핵심 거점이라 트럼프에게 결코 내줄 수 없어 클린턴이 쐐기를 박은 것이다.

전당대회에 직접 나서고 부인까지 동원하며 힘을 실어준 오바마 대통령은 클린턴에게 서운해 할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오바마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정확히 8년 전 대선 후보 당시 아직 협정문에 잉크도 안 마른 한미FTA에 “반대한다”고 강조하며 러스트벨트 유권자들에게 한 표를 호소했다. 정치권력을 위해 국익에 도움이 되지만 인기는 없는 자유무역을 그가 희생양 삼았던 길을 트럼프와 클린턴이 지금 가고 있는 것이다. 선거에 이긴 후 오바마 정부는 실리가 적잖은 한미FTA를 폐기하지 않고 통상협상 역사에 별로 유례가 없는 재협상까지 거쳐 4년 후 발효시켰다.

TPP도 이대로 죽기보다는 오바마 대통령이 한미FTA에 남긴 아픈 유산을 따라 클린턴이 되든, 트럼프가 되든 재협상을 거쳐 2~3년 후면 살아날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곡절이 많았던 한미FTA로 관록을 쌓은 통상 관료들이 지난해 많은 비판 속에도 신중하게 TPP에 접근한 것이 적중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제 남은 것은 미국의 차기 정부에 대응할 과제들 중 하나로 TPP 참여 전략을 우리 정부가 세심하고 치밀하게 마련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막말로 국내에서 새삼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한미FTA를 잘 지키고 활용하는 것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다. runiro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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