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현지시간) 리우올림픽 선수촌에서 유승민 IOC후보가 타국 선수들에게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리우=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너무 많은 축하 문자가 와서 정신이 없을 정도네요. 이제 라면하고 햄버거는 그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18일(이하 현지시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에 당선되며 한국 스포츠 외교사에 새 역사를 쓴 유승민(34)은 이튿날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1년 전 선수위원에 출사표를 던졌던 순간부터 한국 대표로 뽑히기까지의 과정, 최근 4주간의 외로웠던 선거운동이 새록새록 떠올랐기 때문이다.
유승민은 서울경제신문과의 휴대폰 메신저 대화를 통해 불가능해 보였던 도전을 성공으로 만들어낸 벅찬 감정을 전했다. 유승민은 투표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지난달 23일 일찌감치 리우데자네이루에 들어와 외로운 유세를 펼쳤다. 오전7시부터 오후9시까지 하루에 12시간 넘게 선수들을 만나는 생활을 4주 가까이 계속했다. 제대로 된 식사를 했던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생일인 지난 5일에는 유세 중 벌에 쏘이는 일도 있었다. 유승민은 “선수들이 많은 시간은 피해야 해 하루에 두 끼 챙기기도 여의치 않았다”면서 “라면하고 햄버거는 그만 먹어야겠다”고 장난스럽게 밝혔다. 선수촌 식당 등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의 선거활동은 금지돼 있어 유승민은 식사시간이 지난 뒤에야 식당을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의 선수라도 더 만나려면 밥 먹는 시간도 쪼개야 했다. 2011년 홈쇼핑 모델 출신의 이윤희(29)씨와 결혼한 유승민은 “아무래도 아기들과 아내가 가장 보고 싶다”고도 했다.
지난해 8월 진종오(사격), 장미란(역도)을 제치고 한국 대표 후보로 선정됐을 때부터가 ‘깜짝’이었다. 영어 구사 능력에서 받은 높은 점수가 유승민을 한국 대표로 뽑은 가장 큰 이유였다고 당시 대한체육회는 설명했다. 유승민은 “영어는 유럽 리그를 뛰면서 자연스럽게 익혔다. 선수위원 도전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정식으로 공부했다”며 “그러나 아직 부족해서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2000시드니올림픽부터 올림픽에 4회 연속 출전해 금·은·동메달을 1개씩 수확한 그는 2005년부터 오스트리아·프랑스·크로아티아·독일리그를 거친 경력이 있다. 런던올림픽 뒤 현역에서 은퇴했고 2014인천아시안게임 남자대표팀 코치를 맡기도 했다.
12년 전 올림픽에서 유승민의 금메달을 점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번에도 단 4명을 뽑는 투표에서 유승민이 당선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승민은 그러나 자신에게 6전 전패를 안겼던 왕하오(중국)를 아테네올림픽 결승에서 무너뜨렸듯 모두의 예상을 깨고 깜짝 당선에 성공했다. 2016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 참가 선수 전체를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유승민은 유효표 5,185표 중 1,544표를 얻었다. 유승민보다 많은 표를 얻은 후보는 펜싱의 브리타 하이데만(1,603표·독일)뿐이었다.
‘미녀새’ 옐레나 이신바예바(러시아), 일본의 육상영웅이자 2020도쿄올림픽 스포츠 디렉터인 무로후시 고지, 유럽올림픽위원회 선수위원장인 탁구의 장미셸 세브(벨기에), 미국프로농구(NBA)에서 뛰는 루이스 스콜라(아르헨티나) 등이 후보로 나왔다. 인지도에서 모두 유승민을 압도하는 후보들이었다. 그러나 투표함을 개봉하자 유승민은 하이데만, 수영의 다니엘 지우르타(1,469표·헝가리), 육상의 이신바예바(1,365표)와 선수위원 동기생이 돼 있었다.
판세를 뒤엎은 비결은 간단했다. 한국 대표로 나왔다는 사명감과 발로 뛰는 진심이었다. 유승민은 당선 직후 공식 기자회견에서 “현장에 와보니 선수들이 선수위원 선거에 대해 정보가 별로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발로 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매일 선수들을 기다리며 인사를 했다”고 돌아봤다. 그는 “진심을 담아 많이 웃어주고 힘을 실어주려고 노력했다. 어떤 선수들은 내가 항상 같은 자리에서 밝은 웃음으로 맞아줘 힘이 났다면서 내게 투표했다고도 했다. 기대를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진심을 다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 생각한다”고 말했다. 유승민은 리우에서 선수위원 자격으로 IOC 총회와 폐막식에 참석한 뒤 23일 귀국길에 오른다.
전세계 15명뿐인 IOC 선수위원은 일반 IOC 위원과 동등한 자격을 가진다. 동·하계올림픽 개최지 선정과 올림픽 종목 결정 등에도 직접 참여한다. 각각 임기가 8년이라는 점과 80세까지 정년이 보장된다는 것만 다르다. IOC 회원국에 비자 없이 입국이 허용되며 총회에 참석할 때는 전용 승용차와 안내요원을 배정 받는다. 탑승 차량과 머무는 호텔에는 IOC 위원이 소속된 국가의 국기가 게양된다.
유승민 이전에 한국의 IOC 위원은 와병 중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뿐이어서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비상이 걸렸으나 유승민의 당선으로 스포츠 외교에도 숨통이 트이게 됐다. 한편 선수위원을 염두에 뒀던 김연아는 한 국가에 1명이라는 규정이 있는데다 선출 당해 연도 올림픽, 또는 직전 올림픽 출전선수로 출마자격이 제한돼 있어 출마가 사실상 어려워졌다. /리우데자네이루=양준호기자 miguel@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