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퀘벡과 아이티. 둘 중 하나를 선택해 가지라면 무엇을 골라야 할까. 퀘벡은 캐나다에서도 가장 잘 사는 지역으로 손꼽힌다. 1인당 연간 소득이 한국의 두 배에 가깝다. 반면 아이티는 세계 최빈국의 하나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전자가 유리하다. 하지만 시계 바늘을 250여년 전으로 돌린다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프랑스는 아이티 지역을 퀘벡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225년 전 카리브해 제도로 가보자.
‘둥둥둥…둥둥둥….’ 1791년8월22일 생 도밍그 북부. 대농장 곳곳에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인 농장주들은 부두(Voodoo)교 비밀의식이라고 여겼다. 그랬다. 식민당국이 금지하던 부두교 의식이었다. 그런데 백인들이 모르던 게 하나 더 있었다. 부두교 의식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흑인 노예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서반구 최초의 흑인 혁명인 생 도밍그 혁명은 아이티는 물론 미국과 프랑스의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아이티 공화국의 옛 이름인 생 도밍그는 프랑스 식민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사탕수수 농장 수 천개와 설탕 공장 800여곳이 성업하며 프랑스 무역의 3분의1 이상을 차지할 만큼 번영 가도를 달렸다. 성장동력은 노예 노동력 착취. 생 도밍그에서 수탈과 착취의 원조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다. ‘신 대륙의 발견자’라고 기억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
1차 항해에서 히스파니올라섬(오늘날 아이티와 도미니카)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4차 항해에 이르기까지 섬을 샅샅이 뒤졌다. 금을 찾거나 뺏기 위해서다. 흑인 작가 C.L.R 제임스의 역자 ‘블랙 자코뱅’에 따르면 콜럼버스가 첫 발을 들일 때 800만명이었던 히스파니올라 섬의 인구는 불과 200여년 만에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흑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서인도제도로 끌려 온 것도 유럽인이 몰고 온 질병과 수탈에 쓰러진 원주민을 대체하기 위해서였다. 생 도밍그는 특히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많았다. 사탕수수가 잘 자라는 지역이었기 때문. 설탕을 만드는 재료인 사탕수수 농사는 품이 많이 들었다. 농사도 힘들지만 수확 후 이틀 만에 쪄내야 설탕이 나왔기에 노동 강도가 높았다. 건강한 아프리카 노예가 생 도밍그에서는 평균수명 7년을 못 넘길 정도로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백인들은 흑인들이 생산한 설탕은 ‘흰 화물’, 흑인은 ‘검은 화물’로 불렀다. ‘검은 화물’과 ‘흰 화물’은 서구를 살찌웠다. 당시 유럽 무역선들이 돈을 버는 방식은 이랬다. ‘배 한 척에 조악한 공산품을 적재하고 아프리카로 향한다. 추장 등 유력자들을 유혹해 흑인들을 넘겨받거나 강제로 잡아 ’검은 화물‘로 바꿔싣고 서인도 제도나 미국에 판매한다. 유럽으로 돌아가는 배에는 설탕이나 커피 등 신대륙에서 나는 물품을 싣는다.’ 배 한 척이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아프리카에서 미 대륙으로, 또 다시 유럽으로 돌아가는 항로가 다 돈이었다. 칼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이 아프리카인에 대한 이 같은 착취로 가능했다.
흑인들의 봉기가 일어난 생 도밍그는 프랑스에게 보물과 같은 곳이었다. 프랑스 식민지 생 도밍그 산 설탕은 유럽인들이 해외에서 생산하는 설탕의 총합계보다 많았다. 프랑스가 영국과 전쟁에서 연전연패하면서도 해외무역만큼은 영국보다 빨리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생 도밍그 덕분이다.
북미와 유럽, 인도의 패권을 놓고 영국과 싸운 7년 전쟁(경제사가 찰스 킨들버거는 이 전쟁을 ’경제 패권 전쟁’이자 ‘최초의 세계대전’이라고 평가한다)에서 패전한 프랑스는 생 도밍그를 전리품으로 넘기라는 영국의 요구를 거절하며 다른 곳을 내줬다. 생 도밍그 대신 영국이 받은 곳이 바로 퀘벡이다. 영국 식민지였던 캐나다는 영어를 사용하지만 프랑스 식민지로 프랑스어를 쓰는 퀘벡주가 영국에 귀속된 시기가 바로 이 때다.
프랑스는 흑인 노예 노동력 덕분에 그야말로 꿀을 따먹었지만 봉기는 피를 불렀다. 50만여 흑인들은 봉기 두 달 만에 설탕 공장 200여 곳과 농장 800개소를 불태웠다. 백인 4,000여명도 학살 당했다. 프랑스의 황금 지갑 생 도밍그를 노리던 다른 나라들은 흑인 노예 반란을 기회로 삼아 생 도밍그로 쳐들어왔다. 섬은 혼란에 빠졌다.
가장 먼저 스페인이 흑인들을 꼬셨다. 흑인 노예들은 해방 시켜주겠다는 말을 믿고 처음에는 스페인 편을 들어 프랑스와 싸웠다. 영국도 백인 지주들을 편들며 정규군 8만명을 보냈다. 위기에 빠진 흑인 노예들에게는 영웅이 나타났다. 해방 노예 출신인 투생 루베르튀르는 만나는 적마다 물리쳤다. 영국 군대도 마찬가지. 투생이 지휘하는 흑인 군대에게 패했다. 당시 영국군이 당한 패배는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시기부터 20세기 제 1차세계대전 사이에서 영국 원정부대가 당한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
프랑스 국민회의는 뒤늦게 흑인 군대와 지도자의 효용성을 알아봤다. 뛰어난 용병술로 영국군을 몰아낸 공로를 인정, 투생에게 육군소장 계급장을 달아줬다. 흑인 군대를 이용하던 프랑스의 태도는 나폴레옹 집권 이후부터 바뀌었다. 1801년 4만8,000여명의 병력을 보내 진압에 나선 것. 대화하자는 나폴레옹군의 속임수로 체포 당한 투생은 프랑스로 끌려가 감옥에서 죽었어도 흑인군대는 나폴레옹 군대를 깨부수고 1804년 독립을 선포했다.
자국 내 흑인 노예들의 동요를 우려한 미국은 58년간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첫 흑인 공화국 수립은 스페인 치하 중남미 지역의 독립의식을 일깨웠다. 시몬 볼리바르와 호세 마르틴 등이 주도한 19세게 초중반 중남미 독립혁명은 서반구 최초의 흑인 혁명인 생 도밍그 혁명에 자극받아 일어났다.
생 도밍그 혁명의 덕을 가장 많이 본 나라는 미국. 나폴레옹이 생 도밍그에 보낸 병력의 당초 행선지는 미시시피강 서쪽. 오늘날 미국의 중부와 서부의 프랑스 식민지에 병력을 보내 ‘제 2프랑스’를 건설하겠다는 프랑스의 야망을 뒷받침할 병력이 생 도밍그에 묶이는 통에 미국은 ‘강력한 이웃’이 출현하는 상황을 모면했다. 루이지애나 지역에 ‘제 2프랑스’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은 영민한 군주로 존경받는 앙리 4세부터, 스코틀랜드 출신의 재정총감으로 ‘미시시피 버블’을 야기한 존 로, 쉴리 공작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오랜 꿈이었다.
나폴레옹은 생 도밍그 원정의 사실상 패배로 ‘미주 프랑스 제국’ 건설이 힘들어졌다고 판단했는지 북미 한복판 노른 자위 땅을 미국에 팔아치웠다. 한반도 10배 크기인 루이지애나를 1,000평당 2.45센트, 총 1,500만달러에 구입하는 반사이익을 누린 것. 미국으로 하여금 강대국으로 발돋움 하는 루이지애나 매입의 단초를 제공한 생 도밍그는 정반대로 처참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식민모국인 프랑스는 신생 아이티가 갚아야 할 채무가 있다며 20세기 중반까지 괴롭혔다. 미국은 혼란을 더욱 부추겼다. 아이티의 독립을 승인하면 미국 내 흑인들을 자극할 수 있다며 아예 나라로 여기지도 않았다. 미국 자본이 지원을 끊으면 경제가 휘청거리는 구조가 19세기 중반 이래 이어지고 있다.
아이티에 대한 프랑스의 보복과 미국의 무시는 흑인 정권이 자초한 측면이 강하다. 독립을 선포하며 독립 전쟁기에 보여줬던 백인에 대한 유화적인 모습을 버리고 탄압과 학살 정책으로 돌아서 국제적인 반발을 불렀다. 독립선언 직후인 1804년 봄 신생 아이티 정부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학살한 백인은 3,000~5,000명으로 추산된다. 아이티 신생 정부는 국제적인 시각과 군사적 지휘 능력을 갖고 있던 투생 루베르튀르와 달리 무지하고 단순했으며 부패했다. 제멋대로 칼 춤추는 부패한 권력과 외세의 끊임없는 간섭이 최초의 흑인혁명으로 탄생한 서반구 최초의 흑인국가를 최빈국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