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은 한 달에 한 번 금리를 결정하는 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으로 많은 국민에게 각인돼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연구조직이기도 하다. 국내 대표 싱크탱크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박사급 인력은 65명. 한은은 138명에 해외사무소도 8개나 있다. 정확한 숫자는 비공개지만 이들이 매주 쏟아내는 보고서 분량은 상당하다.
하지만 한은이 만들어내는 연구자료는 한은 문턱을 넘지 못한다. 외부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걱정에서다. “바깥에 발표되는 연구는 안에서 하는 연구의 10분의1도 안 된다”고 할 정도다. 90% 넘는 연구는 내부 보고용으로 쓰인 뒤 사라진다. 젊고 우수한 연구인력을 충분히 갖췄지만 이들이 무엇을 연구하는지는 베일에 싸여 바깥에서는 알 방법이 없다.
반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홈페이지에서 박사급 이코노미스트 300여명의 이름과 사진, 전공 분야, 연구실적을 공개한다. 어느 분야의 보고서를 냈는지 어떤 대외활동을 벌였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적어도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는 우리 금융통화위원회처럼 “일반 국민에게 알기 쉽게 전달해달라”고 채근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한국 경제는 ‘가보지 않은 길’을 걷고 있다. 실력 좋은 길잡이가 필요하다. 구조적 침체의 끝은 언제인지, 고령화 충격은 얼마나 될지, 디플레이션 위험은 없는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대답해줄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 민간 기업이 가라앉고 정부가 흔들릴수록 더 그렇다. 하지만 한은은 안 가본 길을 앞장서기는커녕 가본 길조차 돌다리를 두들기느라 바쁘다. 한국은행법 5조에 ‘한은은 업무를 수행하고 기관을 운영할 때에는 공공성과 투명성을 확보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지만 적어도 연구실적은 해당하지 않아 보인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보면 주인공 걸리버는 하늘을 나는 섬나라 ‘라퓨타’를 방문한다(일본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의 원조다). 땅에서 3.2㎞ 떨어진 높이에 있는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수학과 천문학에 뛰어나지만 정작 일상생활은 미숙하고 뒤죽박죽이다. 양복점에서 맞춘 옷은 모양도 형편없고 몸에 맞지도 않으며 집을 지으면 어느 방이나 비스듬하다. 실생활과 동떨어진 이론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풍자다. 라퓨타를 보면서 땅(현실)에 일정한 거리를 둔 한은을 떠올린다면 무리일까. /bluedash@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