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춘 500 ¦ P&G는 과거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소비자 브랜드 제국’ P&G는 지난 10년 동안 험난한 시기를 보내왔다. 3년간 3명의 CEO를 맞은 이 회사는 조직의 군살을 빼고 목표에 대한 집중력을 높여 놓은 지금부터 수 년간의 저조한 수익률을 딛고 다시 도약할 수 있을까?

프록터 앤드 갬블 기업 프로파일
RANK 34
매출:
788억 달러
이익: 70억 달러
직원 수: 11만명
총 주주 수익률 (2005~2015년 연평균): 6.2%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 위치한 프록터 앤드 갬블 Procter & Gamble(이하 P&G) 본사 9층과 10층 보안구역 내에는 유통혁신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일명 ‘I’라 불리는 이 센터는 매끈한 외관 안에 디지털적 요소가 가득했다. P&G 경영진은 향후 회사의 재도약을 가능케 할 요소들이 이 센터에 모두 있다고 믿고 있다.

몇 년간 다른 장소에 있던 이 센터는 지난해 대대적 개편 후 이 곳으로 이전했다. 설립 목적은 주요 고객을 대상으로 P&G의 스토리텔링 홍보를 하는 것이다. 우버 Uber부터 에어비엔비 Airbnb까지 창조적 파괴를 실천한 기업 사례의 자료영상이 그곳에 있었다. P&G 제품과 경쟁사 제품이 함께 놓인 매대 모형, P&G 제품이 가정에 비치된 모습을 재현한 공간(테이블에 기저귀가 놓인 교외 주택의 아기 방, 빨래를 비치한 아파트 등)도 있었다. 거기엔 속옷과 생리대, 탐폰 제품의 흡수도를 보여주는 여성용품 전용 전시공간도 있었다. 회사 입장에선 중요한 비즈니스를 보여주는 곳이었다.

관람객은 첫 번째 방 대형 스크린에서 신기술 및 마케팅 전략이 어떻게 현실에 적용되는지 소개하는 영상을 감상할 수 있었다. 눈을 뗄 수 없는 멋진 영상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수백 개의 사례 중 P&G의 자체 혁신은 한 건도 없었다. 센터 측의 설명에 따르면, 월마트와 타깃 같은 대형 유통업체 고객사들을 겨냥한 의도적 선택이었다. 이들에게 놀랍도록 빠른 변화의 속도를 인지하게 한 후, 소비자용품 시장을 바꾸려는 P&G의 노력을 소개한다는 전략이었다. 또 센터는 빅데이터를 활용해 고객사별 맞춤형 분석도 제공하고 있었다. 최종 목표는 P&G가 현대적이고 참신한 기업이란 점과, 불확실성으로 상징되는 이 신세계에서 경쟁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P&G(매출 788억 달러) 외부에서 탄생한 창조적 파괴의 사례가 그토록 많다는 사실은, 역으로 최근 사내에서 창출한 혁신이 너무나 적다는 것을 동시에 의미했다. P&G의 역사가 유례없는 혁신의 연속이었음을 고려하면 뜻밖의 상황이라 할 수 있다. P&G에는 홈페이지의 기업 연표는 읽는 이가 놀랄 만큼 세상을 바꾼 신기술(세계 최초의 불소 함유 치약, 최초의 합성세제 등)로 가득하다.

P&G만큼 많은 글로벌 브랜드를 보유한 기업도 없을 것이다. 아이보리 Ivory 비누(1879년), 크리스코 Crisco 쇼트닝(1912년), 팸퍼스 기저귀(1961년), 바운스 Bounce 섬유유연제(1972년), 돈 Dawn 주방세제(1973년), 올웨이즈 Always 생리대 (1983년), 페브리즈 (1998년), 청소용품 브랜드 스위퍼 Swiffer (1998년) 등이 대표 상품들이다. 그 밖에도 P&G에는 인수한 브랜드들(질레트 면도기, 팬틴 샴푸 등)이 꽤 많이 있다. 또 P&G는 시장조사를 제대로 활용한 최초의 기업(1920년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P&G는 그걸로도 모자라 1933년 ‘연속극(soap opera)’을 처음 탄생시키기도 했다.

과거의 영광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문제는 과거를 추억하고 싶게 만드는 현재에 있다. P&G 보유 브랜드들은 210억 달러에 달하는 매출과 높은 안정성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내놓은 신규 브랜드 중 어느 것 하나도 매출 10억 달러 이상을 달성하지 못했다. 세제 브랜드 타이드 포즈 Tide Pods가 2012년 10억 달러를 돌파하긴 했지만, 신제품이라기보단 새로운 배달 방식 덕분에 올린 실적이었다.

작년 11월 취임한 신임 CEO 데이비드 테일러 David Taylor는 ‘혁신의 가뭄’이 곧 끝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P&G는 R&D 조직을 재정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장과 유리된 고위 임원들보다 각 제품사업부를 이끄는 경영진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캐시 피시 Kathy Fish 최고기술담당자(CTO)는 회사가 “고객이 감탄사를 내뱉을 만큼(wow the customer)” 기억에 남는 경험,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을 바꿀 수 있는 혁신적 기술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 동안은 소비자들의 가치 제고와 연관이 없는 일들을 너무 많이 해왔다”며 “그 결과 소비자들이 우리 제품을 구매할 확률이 낮아졌다”고 반성을 하기도 했다.

테일러는 몇 가지 긍정적 조짐이 있다고 말했다. 그 중 하나는 ‘친환경’ 세탁세제 타이드 퍼클린 Tide purclean, 세탁물에 향을 더해주는 고체 섬유유연제 다우니 언스토퍼블 Downy Unstopables, 페브리즈 차량용 방향제 같은 신제품이라 할 수 있다. 모두 기존 브랜드와 같은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신기술이 적용되어 있다. 후자 두 개의 제품은 출시 첫해 각각 3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P&G 같은 거대 기업에서도 이 정도면 눈에 띄는 성과라 할수 있다.


테일러는 변화에 시간이 걸릴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그의 현재 목표는 지난 몇 년 동안 존재했던 경영진의 혼란, 전략적 오판, 달러화 강세(다른 기업들보다 타격이 컸다) 같은 여러 가지 거시경제적 악재를 딛고 P&G를 ‘혁신의 마스터’ 지위로 다시 올려 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건 쉽지 않은 목표다. P&G 매출은 2012년 837억 달러로 정점을 찍은 후 정체됐고, 이후 일부 브랜드를 매각하면서 감소세로 돌아섰다. P&G 제품 중 절반 이상이 지난 17분기 중 14분기 동안 시장점유율을 깎아먹었다. 매출도 최근 5분기 가운데 4분기 동안 전문가 예상보다 부진을 보였다. 주가도 지난 2년간 불과 6.5% 오르는 데 그치는 등 정체 상태였다. 같은 기간 라이벌 콜게이트 Colgate는 23%, S&P 500 평균은 29% 상승했다.

그래서인지 P&G에선 인재들도 줄줄이 빠져나갔다. ‘돌아온 탕아’ A.G. 래플리 A.G. Lafley의 CEO 복귀도 P&G에겐 역부족이었다. 래플리는 직접 지명한 후계자 로버트 맥도널드 Robert McDonald가 거센 비판을 받고 2013년 사임하자 다시 CEO를 맡았다. 맥도널드의 사임을 불러온 내분은 가라앉았지만, 회사가 다시 반등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도 동시에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인터뷰를 허용하지 않은 36년차 P&G 베테랑 테일러(58)도 “구체적 실적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말도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세계적 대기업은 단 한 번만 잘못된 길에 빠져도 쉽게 회복을 하지 못한다. HP는 길을 잃은 채 자기해체의 수순을 밟고 있다. 코닥, 야후, 소니, 시어스 백화점도 마찬가지다. 물론 P&G의 현재 위기가 치명적인 수준이라고 얘기하는 건 아니다. 작년 이익 70억 달러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생활용품 시장에서의 핵심적 지위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최고의 마케팅·브랜드 전문가, 최고의 과학자들을 끌어들였던 과거의 지배적 위치와 열정, 매력은 아직 되찾지 못하고 있다.

테일러는 P&G의 과제를 솔직히 털어놓으며 휘하 직원에 대한 신뢰와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경영진 중에 현 상황을 유지하자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평생을 P&G에서 보낸 사람은-아니, 그 누구든 간에-P&G의 마법을 되살릴 수 있을까?

CEO 승계는 복잡하고 때론 혼란스러운 과정이다. 밥 아이거 Bob Iger CEO의 후임을 찾는 데 애를 먹고 있는 디즈니 이사회나 미디어기업 비아컴 Viacom의 경영권을 장악하기 위해 93세의 섬너 레드스톤 Sumner Redstone과 맞서 싸우는 이들을 보면 그런 사실을 알 수 있다. 2009년만 해도 P&G는 이런 문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당시 CEO 래플리는 퇴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는 10년 이상 회사를 이끌며 극적인 혁신과 개혁을 진두지휘 했고, 2005년에는 570억 달러에 질레트를 인수해 회사 몸집을 두 배로 키우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내부 승진을 추구하는 P&G에서 인재관리 및 승계 계획은 회사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로 꼽혀왔다. P&G의 핵심 성공 비결 중에는 세탁 기술이나 기저귀 성분 공식 외에도 파란색 바인더가 하나 더 있다. ‘인재 포트폴리오’라는 이름의 이 바인더는 120개 임원직 전체에 대한 모든 후보자는 물론, 이들보다 몇 단계 낮은 직급의 2차 후보군 데이터까지 총망라하고 있다. 필자는 2009년 당시 COO 맥도널드가 어떻게 래플리 후임으로 정해졌는지, 그 정교한 절차를 심층 보도하는 과정에서 이 바인더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방식은 훌륭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 침체기에 회사를 맡았다는 건 분명 불운이었다. 하지만 맥도널드는 분열을 조장했고, 목표를 지나치게 많이 제시한 나머지 진짜 우선순위를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강력한 회장(P&G의 특장점 중 한 가지다)으로서의 자질도 부족했다. 래플리는 취임 6개월 만에 회장직에서 물러나면서 맥도널드에게 모든 뒷일을 맡겼다.

래플리가 처음 CEO를 맡았을 때 내린 결정 가운데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복잡한 파급효과를 낳고 있었다. 북미 시장에서 프리미엄 라인(올레이 Olay 브랜드 고가 화장품 등)에 집중하는 전략은 금융위기로 인해 구매력이 떨어지자 악재로 작용했다. 또 래플리는 당시 ‘글로벌 비즈니스 부문’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과거보다 권한이 줄어든 개별 브랜드 및 국가 담당 경영진들은 각 지역의 특성을 충분히 살릴 수 없었다.

‘혁신’도 새로운 아이디어라기보단 기존 제품의 가벼운 변형에 가까웠다(예컨대 팬틴 샴푸는 곱슬머리용, 중간 이상 굵기용, 열 보호, 윤기 강화 등으로 세분화되었다). P&G 부회장을 역임한 베르너 가이슬러 Werner Geissler는 “R&D쪽 사람들이 시장 판도를 바꿀 혁신 대신 자잘한 외적 개선에 너무 집중했다. 헤드앤드숄더 사과샴푸나 해초샴푸 같은 것이 그런 제품이었다”고 지적했다(이런 제품이 있었나 싶겠지만, P&G는 실제 두 제품을 판매했다).


그럼에도 개도국-수십억 달러 규모의 신흥 중산층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진출은 합리적 결정인 듯 보였다. 그러나 기대한 것보다 훨씬 변동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이 결정이 맥도널드의 운명을 좌우했다. 그는 2011년 “P&G가 2015년까지 중국, 러시아 및 기타 신흥시장에서 총 8억 명의 새로운 소비자를 확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당시 이를 “무게중심의 결정적 이동”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P&G의 실적은 한동안 실망의 연속이었다. 결국 주가가 떨어지고, 불만을 품은 은퇴자들(퇴직금을 주식으로 받았다)은 맥도널드의 사임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행동주의 투자자 빌 애크먼 Bill Ackman도 P&G 주식을 매입한 후 맥도널드의 리더십을 공개 비난했다. 느리게 움직이는 P&G의 관료주의적 체제가 길을 잃은 형국이었다.

2013년 5월 23일, 맥도널드는 P&G에서 갑작스럽게 ‘은퇴’를 했다. 그리고 66세를 앞두고 있던 래플리가 다시 돌아왔다. 은퇴 후 재혼해 플로리다에서 새 가정을 꾸린 그는 철인 3종 경기에 열중하면서 파트타임으로 사모펀드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박수를 받으며 떠났던 전 직장으로 갑작스럽게 복귀했다. 이사회는 위기에 빠진 회사를 구할 인재는 래플리뿐이라고 판단했다. 두툼한 두께에도 불구하고, P&G의 파란 바인더에는 인재가 충분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러나 ‘래플리 2.0’은 혁신적 돌파구라기보단 기존 브랜드의 확장에 가까웠다. 돌아온 래플리는 자신의 업무 범위를 예전보다 좁게 설정했다.그 같은 방향엔 젊음과 에너지도 부족했다. 소비자에게 “진실의 순간(moments of truth)은 두 번 찾아온다”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경영 비전을 설파하던 과거 그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래플리는 새로 익힌 사모투자 관련 기술을 활용해 어떤 브랜드와 제품군에 집중하고, 어떤 것을 폐기할지 막후에서 선택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분기별 실적보고를 더 이상 직접 발표 하지 않았고, 언론과의 접촉도 거절했다. 중국 시장이 회사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였지만, 재임 2년 반 동안 그 곳을 두 번 방문하는데 그쳤다. 그는 신시내티에서 다시 살 생각도 없었다. P&G는 주말마다 플로리다 자택으로 돌아가는 래플리의 비행기 비용으로 작년에만 51만 2,000달러를 지출하기도 했다.

한때 열정이 넘쳤던 래플리는 이젠 의무감과 (아마도) 자신의 업적을 유지하고 싶은 생각에 일을 계속하고 있는 듯했다. 작년 12월 UCLA 앤더슨 경영대학원(Anderson School of Management)에서 한 강연에서, 그는 복귀 이유를 묻는 청중의 질문에 “간단히 말하면 ‘의무’고 ‘아직 끝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래플리는 자신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다시 되돌리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했다. 2014년 P&G는 166개 브랜드 중 일부를 매각할 예정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그 결과 116개 브랜드가 매각됐다. 그 중에는 래플리 본인이 인수를 적극 지지했던 샴푸 브랜드 웰라 Wella(2003년 70억 달러에 인수)와 클레어롤 Clairol(2001년 50억 달러에 인수)도 끼여 있었다. 2015년 미용용품업체 코티 Coty가 두 브랜드를 다른 브랜드 40여 개와 함께 125억 달러에 인수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2005년 질레트와 함께 인수했던 듀라셀 Duracell은 올해 워런 버핏에게 팔렸다(‘오마하의 현인’은 배터리 사업 인수를 위해 P&G 주식 5,200만 주를 매각했는데, 그가 P&G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인 전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떨어지는 시장점유율: 분기별로 본 P&G 제품의 시장점유율 하락.
래플리(그 후에는 테일러)는 P&G의 중국 전략 재검토에 들어갔다. P&G는 1988년 일찌감치 중국에 진출했지만, 상류층의 성장세를 과소평가해 중산층 이하 시장에 집중했다. P&G의 기저귀가 일본제 고가 제품군에 비해 열세인 상황이 단적인 예이다. 유로모니터&시티리서치 Euromonitor & Citi Research의 분석에 따르면, P&G의 시장점유율은 2010년 대비 거의 5%p나 하락해 현재 37%에 그치고 있다. 테일러는 최근 한 행사에서 “중국이 개도국이라는 관점에 빠져 전 세계에서 가장 안목 높은 소비자들을 과소평가했다”고 털어놓았다. 현재 P&G는 중국 고급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P&G는 현재 중국시장보다 점유율이 더 높은 북미 시장에 대한 자원 배분도 늘리고 있다. 조직의 규모와 관료주의는 줄이면서, 그 일환으로 대규모 구조조정(올해 말까지 3만 5,000명 감축 예정)까지 단행하고 있다. 또 제품군을 15가지에서 10가지로 줄이며 ‘집중과 선택’ 전략을 취하고 있다. 오랫동안 CFO를 맡고 있는 존 몰러 Jon Moeller는 “우리는 소비자들이 차이를 느낄 수 있고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사용되는 기술을 보유한 제품군만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큰 호평을 받았던 전략을 스스로 폐기한 데 대해 래플리는 당당했다. 상황이 다르면 대응도 달라져야 한다는 게 그의 견해였다. 앤더슨 스쿨 강연에서 래플리(그는 이번 호 기사를 위한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는 “내 커리어에는 매우 흥미로운 기회가 두 번 있었다. 두 기회는 서로 180도 달랐다. 2000년 당시 과제는 성장이었다. 확장과 확대 전략이 필요했다. 하지만 내가 돌아왔을 땐 과도한 확장과 확대가 문제였다(…)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는 두 전략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에 대해선 침묵했다.

그리고 2년 후, 래플리는 또 한 번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했다. 비록 최고 수준의 성장을 회복하진 못했지만, 자신이 어려운 결정을 내렸고 회사의 재정비도 마쳤다고 생각했다. 래플리는 당시 글로벌 미용·그루밍·건강관리 사업부 그룹 사장이었던 테일러에게 CEO직을 물려주고, 자신은 2015년 11월부로 회장직을 맡는다고 발표했다. 그 후 이사회는 여러 방면으로 외부 영입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결국엔 래플리의 또 다른 작품-P&G에서 평생 근무한 인재-을 선택했다(이후에도 중대 발표는 계속 됐다. 래플리는 6월 1일 “7월 1일부로 회장직에서도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이번에는 8개월 만의 퇴진이었다. 6개월만에 맥도널드에게 CEO직을 넘겨준 처음보다는 다소 기간이 길었다).

내부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테일러가 안정성과 업무에 대한 관여도 양쪽 측면에서 현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인재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는 신뢰하는 부하 직원에 열정을 불어넣는 인물로, P&G 정신이 뼛속 깊이 새겨진 ‘좋은 상사(good guy)’로 알려져 있다.

그는 원래 플랜트 엔지니어로 시작해 12년을 근무했다. 그러나 이후 브랜드 관련 업무를 희망, 팸퍼스의 보조매니저로 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겸손함이 없었다면 결코 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P&G 가정용품 사업부에서 제품 공급을 총괄했던 개리 마틴 Gary Martin은 테일러가 플랜트 매니저였을 때 인연을 맺었다. 그는 “테일러는 언제나 인기가 좋았다. 내가 관리하는 6만 5,000명 직원 중에서 유망한 인재 설문조사를 하면 그가 항상 1위를 독차지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테일러는 노스 캐롤라이나 주 출신으로 농구를 사랑하는 기독교인이며 백인이다. 인적 구성의 다양성 개선이라고 부르긴 다소 어려운, 전형적인 P&G 임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아기용품 경험이 가장 많지만 여러 대륙을 누비며 미용, 그루밍, 직물 관리제품 관련 업무도 맡은 적이 있다. 마케팅보단 운영에 더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휴지 사업의 유럽 진출과 애완동물용품 매출 증대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일부 전임자들과 달리, 테일러는 직원들을 편안하게 해 주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P&G의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을까? 시티그룹의 베테랑 애널리스트 웬디 니컬슨 Wendy Nicholson은 “(테일러는)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실제로 대화를 해 보면, 그의 언어는 고차원적일 때가 많다. ‘우리는 소비자와 문화를 생각한다’ 같은 식이다. 그런 말이 사람의 기분은 좋게 해주는 건 맞지만, 올바른 접근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테일러는 그런 비판을 이해하지만 “그 문화를 이해한다는 게 나의 강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물론 평범한 직장상사인 척 하며 들어와 회사를 뒤엎어 놓은 ‘숨은 반란군(secret rebels)’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텔의 앤디 그로브 Andy Grove 전 회장이 좋은 예이다. GM의 메리 바라 Mary Barra나 마이크로소프트의 사티아 나델라 Satya Nardella도 유사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테일러는 P&G에 36년을 바친 정직한 성품의 붉은 머리 남자다. 그가 체크무늬 남방 속에 혁명가의 심장을 감춰두었을 가능성은 현재로선 낮아 보인다.

다만 P&G를 향한 테일러의 충성심이 절대적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는 다른 회사의 이사직을 겸직하지 않고 있으며(지난해 자동차 부품업체 TRW의 이사직에서도 사임했다), 졸업식 연설이나 인터뷰 등도 하지 않고 있다(이번 기사는 그의 첫 인터뷰 기사로, 테일러는 자신의 협조 여부와 관계없이 기사가 나간다는 것을 확인한 후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다보스 포럼에도 참석하지 않는다. 모든 에너지를 회사에 쏟아 붓고 있다. CEO 취임 후 달라진 점을 묻자 그는 “한 번 보자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만나는 게 P&G에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내게도 중요하지 않다.”

테일러는 구성원들에게 위기 의식을 불어넣어야 문화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결의를 전하기 위해 인터넷방송과 타운홀 미팅을 자주 개최하고 있으며, 지난 12개월간 20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중국은 3번 찾았다). 그에게 새로운 비전을 ‘포교’하려는 뜻은 없다. 현실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직원들에게 자신과 같은 접근법을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P&G를 바꾸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방안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그는 P&G의 기업분리나 생활용품 브랜드 처치 앤드 드와이트 Church & Dwight 인수 소문 같은 것에 대해선 확실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수많은 브랜드를 매각한 P&G가 트로전 Trojan 콘돔, 암 앤드 해머 Arm & Hammer 베이킹소다, 네어 Nair 제모제 같은 브랜드를 보유한 이 기업을 인수한다면 상당히 놀랄만한 일이 될 것이다).

테일러가 지금까지 내놓은 계획들은 모두 합리적이었지만, 열광적 호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그의 목표는 비대해진 관료주의적 조직체계의 단순화와 현장에 더 가까운 관리자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또, 보상 체계를 개선해 글로벌 실적 외에 지역 및 국가별 성과도 반영하려 하고 있다.

테일러는 파워포인트 발표를 싫어한다. 대신 간단한 평가표를 활용한다. 경쟁사와 비교해 제품별로 녹색(전망이 밝음), 노랑(개선 필요), 빨강(위험) 등급을 매기고, 문제 해결이나 확장을 위한 방안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각 부서의 실적은 최대 경쟁사와 대비해 평가하고 싶다. 직물관리 사업부가 다른 사업부보다 잘 했다, 이런 식의 관점은 원치 않는다.”

2014년 임명된 피시 CTO는 R&D 부문에 혁신을 불어넣고 있다. 전체 시장 점유율 향상에는 기여하지 못하면서 자사의 기존 브랜드를 잠식하는 프로젝트도 점차 축소되고 있다. 피시는 P&G가 기술적 우위를 회복한 사례로 칫솔질한 시간과 빠뜨린 부분을 기록해 주는 ‘오럴비 블루투스 칫솔’, 피부 나이를 측정해 주는 SK-II의 ‘매직 링 Magic Ring’ 등을 꼽았다.

그러나 최첨단 과학보단 가치, 성능, 지속가능성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에겐 이런 장점이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는 외부 의견도 있다. 2011년 탄생한 달러 셰이브 클럽 Dollar Shave Club은 괜찮은 제품을 온라인에서 저렴하게 판매하는 전략으로 면도기 시장 점유율 8%를 달성한 바 있다. P&G에겐 놀라운 사건이었다. 자산운용사 샌퍼드 번스타인 Sanford Bernstein의 애널리스트 알리 디바즈 Ali Dibadj는 “P&G가 기술적으론 최고의 제품을 만들지만, 소비자는 감정적 유대, 틈새시장 특화, 맞춤형 제품을 원한다. 더 어니스트 컴퍼니 The Honest Co. (*역주: 윤리적 소비를 내세운 미국의 생활용품기업) 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이 회사 세제가 P&G의 타이드 세제보다 나은지 논쟁하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 사람들은 이 브랜드를 사용하는 것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는가? P&G는 이런 부분을 놓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달러 셰이브 클럽에 맞서기 위해 P&G는 2015년 질레트의 온라인 판매를 시작했다. 동시에 달러 셰이브 측을 지적재산권 침해로 고소했다(달러 셰이브 측의 한 대변인은 특허 침해 혐의를 부인하면서 “재판으로 경쟁을 막으려는 질레트의 시도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반면 맥도널드 CEO 시절 시작된 비용절감 노력은 점점 가속화하면서 부인할 수 없는 성과를 내고 있다. 2014년 당시 P&G와 협력관계를 맺고 있던 광고대행사는 무려 6,000개에 달했다. 이를 약 40% 줄이면서 마케팅 및 생산 비용이 현재까지 총 5억 달러 감소했다. 이 같은 비용 절감은 향후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현재 P&G는 총 100억 달러 규모의 비용절감 계획을 진행하고 있다. 이 계획의 핵심은 북미와 유럽의 공급망 전면 개혁이다. 글로벌 제품공급책임자 야니스 스코우팔로스 Yannis Skoufalos는 “백지에서 시작한다는 자세로 시스템을 재구축 중”이라고 설명했다. P&G 규모의 대기업에겐 기념비적인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비용 절감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옛 격언이 말해 주듯, 위대함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지난해까지 P&G 북미사업부를 이끌었던 멜러니 힐리 Melanie Healey는 “CEO가 비용절감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녀가 지칭하는 CEO는 래플리지만, 그건 테일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매출 성장을 위한 투자도 하면서 초반부터 균형을 잡았어야 했다. 주주가치 실현을 위해선 둘 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속적인 비용 절감은 사기 진작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해고 아니면, 업무량 증가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P&G에서 이직자가 꾸준히 발생하는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P&G의 현직 임원 여러 명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한 전직 고위임원은 “사람들이 겁에 질려있다. 당당함과 자신감을 잃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P&G는 당당함을 조금 줄일 필요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성공에서 오는 ‘대마불사’의 자신감이야말로 파멸의 단초다. P&G, 특히 테일러는 현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실 인식을 통한 변화는 과연 성공적일까? 회사의 한 전직 고위 임원은 이렇게 지적한다. “P&G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알고 있다. 지구상 어떤 기업보다도 많은 소비자 데이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해결할 수단도, 아이디어도 있다. 하지만 사내 문화가 아이디어의 재빠른 실행을 가로막고 있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BY JENNIGER REINGO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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