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환 TJ미디어 회장 /권욱기자
‘사람은 자기를 기다리게 하는 자의 결점을 계산한다.’ 약속 지키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프랑스 속담이다.시간 약속이든 돈을 갚기로 한 약속이든 지키지 않으면 사람 간 관계에는 점점 균열이 생긴다. 하지만 약속을 잘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 나폴레옹은 약속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 약속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비즈니스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온갖 권모술수와 이합집산이 난무하는 곳이 비즈니스의 세계다. 이런 가운데서도 신의를 가장 큰 인생 모토로 삼고 사업을 하는 경영자가 있다. 바로 윤재환 TJ미디어(032540) 회장이다.
29일 서울 등촌동 TJ미디어 본사에서 만난 윤재환(사진) 회장은 “의지를 가지고 작은 약속 하나도 잘 지켜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 간의 신의”라고 강조했다. 그의 40년 창업 인생은 ‘믿음’ 하나로 헤쳐왔다는 말과 함께.
지난 1982년 노래반주기 사업에 앞서 자동차용 반주기를 제조해 판매하던 윤 회장은 차를 타고 전국을 누볐다. 물류나 정보망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고속버스로 제품을 배송하거나 지방 도매상을 직접 찾아가 거래대금을 수금해야 했다. 신뢰를 중시했던 그는 약속한 시간에 맞추기 위해 잠을 줄였다. 새벽 2시에 일어나 차를 몰고 쉼 없이 달리면 아침 7시쯤 부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목욕탕에 들러 씻고 아침밥을 먹은 후 거래처에 도착해 9시 전에 거래처 관계자를 만났다. 부산의 주요 거래처였던 서면과 국제시장을 돌고 바로 호남에 있는 광주광역시로 넘어가면 날이 저문다. 광주에서 거래대금을 받고 업계 동향 등을 파악한 후 서울에 오면 새벽 1시가 훌쩍 넘었다. 그는 “내 몸이 조금 피곤해도 거래처와 맺은 약속은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다”며 “그 당시 많은 지방 도매상들과 친분이 커졌다”고 회상했다.
쌓아온 신의는 위기의 순간에 빛을 발했다. 일본의 라디오 기술 전문잡지를 구독하던 중 ‘컴퓨터 자동연주기’라는 지금의 노래반주기 개념을 발견한 윤 회장은 상품을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자동차용 반주기를 다 팔고 살던 집까지 담보로 대출을 받았지만 개발과 저작권 승인 비용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때 오랫동안 거래해온 지방 거래처 사장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성실한 윤 회장을 봐왔던 그들은 흔쾌히 자금을 빌려줬다. 문서도 작성하지 않고 5명의 거래처 사장들로부터 각 1억원씩 총 5억원을 조달했다.
노래반주기를 개발할 기술자를 구할 때도 네트워크의 힘을 빌렸다. 이제 막 286세대 컴퓨터가 등장한 1987년, 컴퓨터를 제대로 다루는 사람이 많지 않았던 때다. 개발자를 구한다고 이야기하자 여기저기서 사람을 소개해줬고 1989년에 상품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다.
노래반주기 사업은 1990년대 초반 경제호황기와 맞물려 큰 성공을 누렸다. 음주가무를 즐기는 국민 정서와도 맞물리면서 노래반주기는 날개를 단 듯 팔려 나갔다.
1991년에 ‘태진음향’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코스닥에 상장한 후 사세를 키워나가던 윤 회장은 뜻밖의 어려움을 맞닥뜨렸다. 당시 경쟁사였던 ‘앗싸’에서 부산의 로얄전자와 함께 손잡고 가사 자막 영상이 나오는 노래반주기를 개발한 것. 부산 동아대 앞에 1평짜리 방을 만들어 그 안에 자막이 나오는 노래반주기를 넣어 놓자 이용객이 줄을 섰다. 최초의 노래방이다. 윤 회장은 “동아대 앞에서 인기를 끌면서 서울 이화여대 앞에도 생겼는데 한 달 매출이 450만원을 넘었다”며 “노래방 부스와 자막이 나오는 노래반주기를 합친 가격이 500만원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익률이 매우 컸던 것”이라고 말했다. 500원에 한 곡이었다고 하니 한 달 동안 약 9,000곡의 노래가 불린 셈이다.
윤재환 TJ미디어 회장 /권욱기자
주도권은 빼앗겼지만 좀 더 나은 성능의 기계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윤 회장은 음질과 음향에 집중했다. 수소문 끝에 방송국에서 일하던 직원과 손잡고 미디(컴퓨터를 이용해 음악을 편집하거나 특수한 효과를 내기 위해 주로 사용하는 표준 규격) 방식의 음악을 제작했다. 그는 “쉽게 말하면 휴대폰이 처음 보급되기 시작했을 때 벨소리는 단음이었다”며 “우리 회사가 개발한 건 32화음 벨소리였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막의 서체도 고급스럽게 변형했다. 곧 시장의 노래반주기는 태진음향의 ‘프로500’ 모델로 대체되기 시작했고 시장 점유율은 95%까지 올라갔다. 노래방이 인기를 끌면서 금영·대영 등 전국적으로 수십개의 회사가 생겨났지만 1997년 11월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지면서 시장은 급속히 얼어붙었다. 거래대금을 못 받은 기업들은 하나둘 무너졌다. 이때 윤 회장이 지켜온 신의 원칙은 또 한 번 빛을 발했다. 처음 사업을 시작한 후 계속해서 현금으로만 거래해왔던 TJ미디어는 부도의 위험이 전혀 없었던 것. 그는 “부품회사 등 협력 업체에서 물량이 들어오면 바로 현금으로 대금을 지불했고 노래반주기를 납품하고 대금을 받을 때도 현금으로만 받았고 어음거래는 하지 않았다”며 “신용이 기반이기는 하지만 어음으로 거래하다 한쪽이 부도가 나면 다른 한쪽의 현금 흐름이 막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현금 자산만 200억원 가까이 있었던 TJ미디어는 은행 이자가 23%까지 치솟으면서 오히려 이득을 봤다. 부품 원가가 올라가고 시장에는 찬바람이 불면서 제조를 할 수 없는 상황이 1년간 지속됐지만 TJ미디어는 살아남았고 사옥도 마련할 수 있었다.
위기의 상황은 조금만 거리를 두고 보면 기회라는 말이 있다. 윤 회장은 힘든 상황을 기회로 바꾸는 능력이 탁월하다. IMF 사태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친 2008년 다시 시장이 주춤했다. 사업을 축소하는 미국 기업들이 늘어났다. 윤 회장은 미국 기업 아트미디어가 자회사 ‘드림’을 매각한다는 사실을 홈페이지에서 발견했다. 드림은 국내 노래반주기 기업에 핵심 칩을 공급하던 프랑스 회사였다. 해당 회사가 중국 기업으로 팔리면 국내 노래반주기 업계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다음날 바로 비행기 표를 구매해 관계자를 만나러 독일로 갔다. 드림의 부사장을 만나 회사 매입 의사를 밝혔다. 2년 만에 윤 회장은 드림사를 인수했고 부품사업을 내부화하면서 원가가 절감돼 사업을 더 확대하는 발판이 됐다.
노래반주기 시장은 외환위기를 전후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TJ미디어와 금영의 양강 체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 윤 회장은 “위기가 없었다면 오히려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우리나라 경기가 좋지 않다고 말하는 지금도 기회가 될 수 있으니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9월 중순쯤에 악기용 노래반주기를 시장에 선보일 예정”이라며 “산업의 변화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100년 기업을 키워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백주연기자 nice89@sedaily.com
He is... △1955년 충남 당진 △1991~1997년 태진음향 대표이사 사장 △1996년 아주대 산업대학원 수료 △1997~2005년 태진미디어 대표이사 사장 △2001년 한양대 대학원 국제관광학과 수료 △2005년~ 티제이미디어 대표이사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