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장을 앞둔 기업들의 회계 투명성을 높여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지정감사제의 독소조항이 예비 상장기업들을 울리고 있다.
현행 지정감사제는 예비 상장기업들이 금융당국이 지정하는 회계법인과 순차적으로 감사계약 협상을 하도록 하고 있는데 지정 회계법인과의 계약을 거부할 수 있는 재지정요청권이 한 번뿐이어서 차순위로 지정된 회계법인과는 무조건 감사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차순위로 지정된 일부 회계법인들은 이를 악용해 평소보다 수배에 달하는 감사보수료를 요구하지만 예비 상장기업들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감사계약을 체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29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일부 회계법인들이 재지정요청권을 행사한 예비 상장기업들과의 감사보수 계약시 평소보다 2~4배에 달하는 보수를 요구해 지정감사제를 악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정감사제는 유가증권·코스닥시장에 상장할 때 금융감독원이 지정한 회계법인으로부터 감사를 받도록 한 제도다. 투명한 회계감사를 통해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됐다. 금감원은 회계법인 140곳을 선정해 지정감사 회계법인을 배정하고 회계법인은 해당 기업의 당해 사업연도의 회계감사를 진행한다. 예비 상장기업들은 지정된 회계법인과 순차적으로 협상을 벌이며 배정된 회계법인을 거부하는 재지정요청권을 한 번 행사할 수 있다.
문제는 복수의 회계법인과 동시에 협상을 진행할 수 없고 재지정요청권을 한 번으로 제한해 예비 상장사들에 불리하다는 점이다. 복수의 회계법인이 제시하는 감사보수료를 비교할 수 없어 시장가격을 파악할 수 없는데다 지정 회계법인을 거부하면 차순위로 지정된 회계법인과는 무조건 감사계약을 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코스닥시장 이전상장을 추진하고 있는 한 코넥스 상장사 대표는 "처음 지정된 회계법인이 평소 2,000만~3,000만원 정도 받던 감사보수를 8,000만원으로 높여 거부했더니 두 번째로 배정된 회계법인은 1억원 이상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며 "감사보수료 비교도 불가능한데 거부권은 한 번만 행사할 수 있다 보니 회계법인들이 횡포를 부리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코넥스 상장사 대표는 "지정감사를 한 회계법인은 이후 3년간 해당 기업의 감사를 맡을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볼 일이 없다고 여겨 과한 보수를 요구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금감원은 뒷짐만 지고 있다.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예비 상장사들이 재지정요청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대부분 회계법인이 감사보수를 너무 많이 부르는 경우"라면서도 "회계법인에 감사보수로 얼마를 받으라고 요청할 입장이 되지 못해 잘 협의하라고 권고만 할 뿐"이라고 전했다.
시장전문가들은 지정감사제의 공공성을 고려해도 현행 제도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한 증권사의 기업공개(IPO) 담당임원은 "금감원과 거래소는 회계 투명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과도한 감사보수와 회계 투명성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금감원이 예비 상장기업의 자산규모 등을 고려해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라도 제시를 하면 좋을 텐데 회계법인과의 충돌을 우려해 수년째 나서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업계는 회계법인에 대한 기업의 선택권을 넓히는 방식으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코스닥 상장을 추진 중인 한 기업 대표는 "회계법인 두 곳을 동시에 배정한 뒤 기업이 한 곳을 선택하는 방식을 택하면 지정감사의 취지도 살리고 현재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김연하기자 yeona@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