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이 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경배 과학재단’ 출범식에서 “과학을 포기하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며 결연한 표정으로 재단 설립 배경을 밝히고 있다. /연햡뉴스
“1991년 태평양화학 총파업으로 회사가 거의 망할 뻔했지만 이듬해 처음으로 했던 작업이 태평양중앙연구소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일수록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발전은 희망에서 비롯되고 과학을 포기하는 것은 미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과학자들이 출현해서 삶이 풍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희망과 힘을 주고 싶습니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은 ‘서경배 과학재단’ 설립 배경과 향후 계획을 묻는 질문에 직접 메모를 하고 대답을 하며 한 시간가량 이어지는 질의응답 시간에 내내 진지한 모습이었다. 그는 본인의 이름 석 자를 과학재단의 이름으로 내걸었을 만큼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며 100년을 이어갈 수 있는 장기적이고 탄탄한 재단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서 회장은 “빌게이츠 재단이나 록펠러 재단이 다 자기 이름을 내세웠는데 잘 안되면 자기 이름에 먹칠하게 되는 만큼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것”이라며 “집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니 재단 출연이 더 늦어지면 늙기 전에 의미 있는 성과물을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9월 출범을 결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서경배 회장이 과학재단을 꿈꾼 것은 부친인 고(故) 서성환 회장과 함께하던 아주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렸을 적 아톰이라는 만화를 즐겨 보고 생물 수업을 재밌게 들었던 서경배 회장은 과학기술의 힘에 대한 동경을 가졌고 그에 앞서 사회적 기업의 책임을 항상 강조하던 선대 회장을 지켜보며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확신하게 됐다. 실제로 서성환 선대 회장은 “재무구조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 조그만 기업이라도 사회에 기여해가며 돈을 번다면 그게 바로 우량기업”이라고 강조하며 태평양장학문화재단(1973), 태평양학원(1978), 태평양복지재단(1982)을 잇달아 설립했다. 서경배 회장 역시 선대 회장의 뜻을 이어 아모레퍼시픽재단·아모레퍼시픽복지재단·한국유방건강재단 등을 운영하며 아모레퍼시픽을 업계 최고 수준의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서 회장은 과학재단의 장기적인 운영을 뒷받침할만한 구체적인 재무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우선 본인의 아모레퍼시픽그룹 주식을 이용해 올해 수백억원가량을 투입하고 향후 지원 사업과 재단 운영에 맞게 주식을 처분해 자금을 마련할 계획이다. 특히 장기적으로는 뜻을 같이하는 이들의 동참으로 재단을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 회장은 “과학자를 지원하고 재단을 운영하는 데 1년에 150억원 정도 투입되는데 3,000억원이면 재단을 완전히 정상화시키는 데 필요한 20년가량을 뒷받침할 수 있다”며 “시작은 3,000억원이지만 10년이나 20년 후 제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고 향후 1조원 이상의 재단 운용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서경배 회장은 이번 과학재단 설립이 아모레퍼시픽이라는 기업의 이해관계와 완전히 분리돼 있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이미 아모레퍼시픽 연 예산의 3%가량을 연구개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다 과학재단의 연구 과제는 순수 과학인 만큼 기업과의 연관성은 매우 낮다는 설명이다. 서 회장은 “과학재단의 구성원들 역시 국가 과학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분들이고 회사와는 완전히 분리돼 활동할 것”이라며 “회사에서 하는 연구를 재단에서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못 박았다.
재계에서는 이번 서 회장의 결단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결정판이라며 진심 어린 박수를 마다하지 않는다. 기존 대기업 오너들의 사재 출연이 상속세 회피 등 특정한 목적이 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서 회장은 과학 발전이라는 순수한 이유로 개인 재산을 대거 기부했기 때문이다. 특히 당장 연구 성과가 나타나기 어려운 기초과학 분야의 지원을 결정한 점에서 의미가 남다르다는 의견이다. 서경배 회장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관심과 사랑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지금까지 받아온 과분한 관심과 사랑을 우리 사회에 반드시 크게 돌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며 “힘들게 번 돈을 멋있게 써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아울러 “이 재단을 통해 원대한 목표를 꿈꾸는 과학자가 계속 나오고 우리가 생각하는 꿈이 현실이 될 것이라 믿는다”며 한국인 노벨상 과학자 탄생이 꿈만이 아닐 것이라고 확신했다. /신희철기자 hcsh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