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해운 채권단 관계자는 기자에게 정치권이 기업 구조조정의 또 다른 장애물이라고 지적했다. 시장논리 및 국가적 손익이라는 큰 그림하에 구조조정을 추진해야 하는데 지역 이기주의와 결탁한 정치권 때문에 ‘표심(票心)’이라는 또 다른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 탓이다. 실제 시장이라는 핵심변수보다 정치적 논리라는 부수적 변수가 구조조정을 쥐고 흔드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무엇보다 구조조정마다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으로 정치권이 참견하면서 관료들은 더욱 눈치를 보게 되고 채권단 또한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이 같은 정치권의 압력이 ‘살려야 할 기업은 죽이고 죽여야 할 기업은 살리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4일 금융계에 따르면 정치권의 입김이 구조조정과 관련한 금융권 보신주의를 강화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해운 구조조정 연석 청문회, 이른바 ‘서별관회의 청문회’다. 지난달 여야 합의로 채택된 청문회 증인 명단을 살펴보면 46명 중 무려 22명이 금융권 인사다. 산업은행은 전현직 행장을 포함한 관계자 9명이, 수출입은행도 이덕훈 행장을 비롯한 5명이 출석해야 한다. 이외에도 임종룡 금융위원장, 진웅섭 금융감독원장을 비롯한 금융당국 관계자 및 무역보험공사 실무자들이 증인으로 채택됐다.
증인 수로만 보면 금융권 관계자들이 구조조정과 직접 연계된 기획재정부·산업통상자원부·대우조선해양·한진해운·STX조선에서 채택된 관계자들과 맞먹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권은 구조조정과 관련해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기보다는 ‘일단 면피부터 하고 보자’는 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금융권 내부의 시각이다.
정치권과 연이 닿은 이들이 구조조정의 최일선에 있는 국책은행장에 잇따라 임명된 것도 금융당국의 보신주의로 이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구조조정 전문가는 “홍기택 전 산업은행 회장이 관료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금융당국에서 어쩌지 못하는 측면이 있었다”며 “이들과 부딪힐 경우 자칫 청와대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는 판단에 관료들이 몸을 사린 면이 있다”고 밝혔다.
정치권이 구조조정과 관련한 원칙을 지역 민심에 따라 흔들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실제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지난 총선 당시 울산 지역 유세에서 “현대중공업 구조조정을 쉽게 할 수 없도록 새누리당이 만들겠다”고 밝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당시 김 전 대표의 발언은 정부가 강조하던 노동개혁과 정면 배치된다는 점에서 비판이 거셌다. 경남기업 또한 고 성완종 회장이 19대 국회 정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시장논리가 아닌 정치논리에 따라 운명이 좌우됐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금융계 고위관계자는 “정치권이 구조조정 이슈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자꾸 간섭하지 말고 주주나 채권단, 정 못 미더우면 정부에라도 맡겨야 한다”며 “정치권이 꼭 힘을 보태고 싶다면 자신들의 권한인 입법권을 활용하는 게 방법”이라고 말했다.
/양철민기자 chop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