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0년대 어느 날 박봉(薄俸)을 견디다 못한 한 판사가 대법원장실을 찾았다. 그에게 돌아온 대법원장의 말은 “나도 죽을 먹고 살고 있소. 조금만 참고 고생합시다.”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街人) 김병로의 얘기다. 해방공간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재판부장 이후 그는 평생 “공직자에게는 청렴이 우선이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일제시대부터 독립운동가를 무료 변론하는 민족 변호사로 이름을 날렸으나 신간회 운동을 하는 동지들의 밥값을 위해 서대문 집을 팔 정도로 돈은 그와 거리가 멀었다. 민족 변호사 활동으로 193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정직처분을 당한 후에는 아예 경기도 양주로 내려가 13년간 농사를 지으며 해방을 맞는다. 농촌에 내려가 있으면서도 총독부의 끈질긴 창씨 개명 요구를 거부했으며 일제가 주는 배급도 일절 받지 않았다.
가인에게 있어서 청렴은 그가 평생 지켜온 사법권 독립과 재판의 독립성 확보라는 소신을 지켜갈 원동력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래 김규식계라는 이유로 가인의 대법원장 임명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이후에도 반민특위종료 논란 등으로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여러 차례 사표 종용도 했지만 가인은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하고도 출근하는 강단을 보였다. 1954년 대통령의 연임을 허용하는 ‘사사오입’ 개헌 직후에도 “헌법 정신에 위배되면 입법부의 반성을 요구할 수 있다”며 이 대통령과 자유당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배 명예롭다.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돼야 한다.” 가인이 1957년 대법원장을 퇴임하면서 남긴 말이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6일 현직 부장판사의 비리에 대해 대국민사과를 하면서 법관 전체의 맹성(猛省)을 촉구하며 인용했다. 가인이 간 지(1964년) 반세기가 넘어가지만 그의 청렴이 이제껏 생생한 이 역설은 무엇을 의미하나. /온종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