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영수의 1998년작 ‘귀로’ /사진제공=아트사이드갤러리
“아이와 엄마는 떼어놓으려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아이는 엄마 품을 생각하고 엄마는 아이를 영원히 잊지 않습니다. 그렇게 ‘백일몽’은 세상에 존재합니다. 엄마는 아이를 사랑합니다. 아이의 엄마는 사랑스럽습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사랑합니다….”100세를 바라보는 원로작가 백영수(94) 화백이 어눌한 말투로, 같은 뜻의 문장을 몇 번이고 거듭 반복했다. 어느새 눈시울도 촉촉하게 젖었다. 어머니와 아이의 영원한 사랑을 되뇌는 그의 느릿한 목소리는 지난 50년 이상을 ‘모자상(母子像)’에 천착한 이유가 그리움 때문임을 설명하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계란형 얼굴의 인물상, 특히 순수의 결정체 같은 아이가 영혼의 안식처 같은 어머니의 품에 안긴 모자상은 백 화백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나자마자 아버지를 여읜 두 살배기 그를 안고, 스무 살이 채 안 된 젊은 어머니는 외삼촌이 있는 일본행 배에 몸을 맡겼다. 백 화백의 부인 김명애(68) 씨는 “남편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시어머니가 바쁘셨던 모양인지, 엄마 사랑을 잘 못 받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모성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 같다”며 대화가 쉽지 않은 작가를 거들었다. 실제로 백 화백은 자신의 모자상을 채워지지 않은 욕망으로 꾸는 헛된 꿈을 뜻하는 백일몽(白日夢)이라 불러왔다.
1988년작 ‘창가의 모자’ 앞에서 백영수 화백은 “아이와 엄마는 떼어놓으려 해도 떼어낼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로 50년 이상 ‘모자상’을 그려온 이유를 설명했다. /사진=조상인기자
1922년 수원에서 태어난 백영수는 1950년대 김환기·이중섭·유영국·이규상·장욱진 등과 함께 ‘새로운 사실(寫實)화의 추구’를 내세우며 한국 최초의 추상주의적 화가 모임인 ‘신사실파’를 결성했다. 신사실파 동인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그가 23일부터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지난 2012년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이후 4년 만이다.“화가가 좋은 전람회를 여는 이상으로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를 잊지 않고 전시를 열어줘 고맙습니다.”
1990년대에 위암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나빴을 때도 유화 작업을 멈추지 않았던 작가는 그러나 지난해 11월 이후부터는 그림을 그리고 사인을 하는 것조차 힘겨워져 잠시 붓을 내려놓았다. 대신 색색의 펜을 긋고 색종이를 오리거나 찢어 붙이는 콜라주 작업을 시작했다. 이번 전시 출품작 총 40여 점 중 25점은 이렇게 작업한 신작들이다. 다시 아이로 돌아간 듯 노장의 그림은 더욱 단순해졌지만 색감이나 구성은 예술세계의 건재함을 보여준다. 애착하는 모자(母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백영수의 2016년작 ‘나르는 모자’ /사진제공=아트사이드갤러리
작가는 지난 2000년에 출간한 회고록을 펼쳐 보이며 자신의 개인전을 보러 온 유영국, 함께 전시 심사를 한 김환기, 이응노, 박영선, 도상봉 등 먼저 간 동료들 이름을 곱씹었다. 가장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이중섭은 “말도 없고 순한 사람”이라고 떠올렸다. 백 화백은 “다른 사람은 다 죽었는데 나만 운이 좋아 살아있다”며 “이왕 산 김에 100살까지 살아야겠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또박또박 다짐했다. 전시는 다음 달 23일까지다. (02)725-1020 /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
백영수의 1998년작 ‘나르는 모자’ /사진제공=아트사이드갤러리
백영수의 1984년작 ‘가족’ /사진제공=아트사이드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