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CNN방송은 90분 남짓한 첫 토론회를 마친 뒤 실시한 긴급 설문조사 결과 62%가 클린턴을 승자로 평가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의 손을 들어준 응답자는 27%에 불과해 클린턴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세부 항목별 조사에서도 클린턴이 현안 이해도 면에서 우위를 차지했다는 응답이 68%에 달했으며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 누가 더 적합하냐는 질문에도 클린턴이 67%, 트럼프가 32%를 각각 얻었다. NBC방송의 여론조사에서도 클린턴 우세로 평가한 응답이 59%로 트럼프(41%)를 크게 앞질렀다.
최근 무서운 속도로 치솟던 트럼프의 기세가 미 대선의 가장 중요한 분수령으로 여겨지는 1차 토론회에서 이처럼 꺾인 것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한 ‘거친 이단아’의 모습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최근 다소 정제된 모습을 보이며 이미지 회복에 성공한 듯 보였던 트럼프는 이번 토론회에서 또다시 민낯을 드러내며 대선의 열쇠를 쥔 부동층의 실망을 초래한 것으로 평가된다.
환한 표정으로 클린턴과 악수를 나눈 뒤 단상에 선 트럼프는 초반에 다소 점잖은 태도로 토론에 임했으나 곧 본성을 드러냈다. 그는 클린턴의 답변 시간에 마구잡이로 끼어들며 사회자인 레스터 홀트 NBC방송 앵커에게 제지를 당하는가 하면 클린턴을 향해 “대통령이 되려면 강한 체력이 필요한데 스태미나도 없고 대통령이 될 얼굴도 아니다”라는 인신공격성 발언을 퍼부으며 스스로의 점수를 깎아 먹었다.
반면 클린턴은 시종일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트럼프에 대한 공격과 반박에 나섰다. 특히 그는 트럼프가 외모 발언을 덮으려 건강 문제를 계속 제기하자 “트럼프는 112개국을 돌며 협상하고 정전협정 등을 맺거나 11시간 동안 의회 청문회를 해본 후에 내게 ‘체력(스태미나)’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점잖게 응수했다. 아킬레스건인 건강 문제를 오히려 자신의 경력을 돋보이게 하는 반전 카드로 만든 클린턴의 재치에 청중들은 환호했다. 클린턴은 또 첫 토론 주제인 일자리 문제와 관련해 트럼프가 “사업을 시작할 때 아버지로부터 1,400만달러를 받은 행운아”라며 ‘금수저론’을 제기하는가 하면 그를 ‘여성·인종차별주의자’라고 규정하고 “트럼프는 과거 여성을 돼지·굼벵이·개로 불렀다”며 카운터펀치를 날리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전체적으로 클린턴이 공격하고 트럼프가 방어하는 분위기였다”며 “트럼프는 이번 토론에 충분히 준비돼 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WP는 이날 사설에서도 “스스로 자격이 없음을 증명한 후보를 낸 공화당 경선은 실패했다”며 트럼프를 혹평했다.
이처럼 토론회에서 사실상 클린턴이 압승을 거둠에 따라 20%에 달하는 미국 부동층 유권자들의 표심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가 토론회에서 자신들의 지지층을 북돋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20%에 달하는 부동층의 등을 돌리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지지 후보를 정하지 않았다고 밝힌 오하이오주의 개럿 데커(30)는 WSJ에 “트럼프는 너무 무례해 대통령이 될 성품이 아님을 절감했다”고 말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시절 백악관 대변인을 역임한 아리 피셔는 “트럼프 지지자는 여전히 트럼프 편이고 클린턴 지지자도 마찬가지”라면서 “부동층은 아마도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했겠지만 이번 토론회에서 클린턴이 차분하고 침착한 상태를 유지한 반면 트럼프는 너무 자주 과열됐다”고 평가했다.
다만 한 차례의 토론회에서 우위를 차지했다고 해서 클린턴의 대선 가도를 낙관하기는 이르다. 18~35세의 젊은 층인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의 표심이 클린턴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 가운데 클린턴 역시 이번 토론회에서 젊은 표심을 사로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뉴스위크는 미국 내 가장 큰 인구 집단인 밀레니얼 세대가 토론회 이후에도 여전히 두 후보 모두에 실망감을 느끼고 있으며 ‘제3의 후보’에 대한 이들의 지지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뉴욕=손철 특파원 runiro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