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지금 이대로라면 한국 VR은 필패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기술적 우위만 자랑하는 한국
전문 콘텐츠·수익 모델 없인
파산 '이리듐' 전철 밟을수도
미래 이끌 VR전략 수립 시급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2010년 미국에서 살 때의 일이다. 오랜만에 가족을 데리고 세쿼이아국립공원에 갔다 큰일을 당할 뻔했다. 미니밴을 운전해 공원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가는데 중간에 희끗희끗한 눈 자국이 보이기 시작했다. 11월 중순에 이미 공원에는 눈이 쌓이고 있던 것이다. 스노체인도 없고 밖은 캄캄한 밤이 돼 있었다. 무엇보다 휴대폰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은 깊은 산속에서 고립무원 상태였다. 천신만고 끝에 내려왔지만 다음날 신문 기사는 나를 경악하게 했다. 그 길을 가던 젊은 남녀의 차량이 실종됐고 결국 길 낭떠러지에서 발견됐다는 기사였다.

미국은 대륙이기 때문에 휴대폰이 전혀 터지지 않는 장소가 수두룩하다. 그걸 모르고 나처럼 섣불리 깊은 산속에 들어갔다 조난당하면 십중팔구 사망이다. 세쿼이아 산속에서, 그것도 눈이 쌓이는 한밤중에 휴대폰이 안 될 때의 절망감은 당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때 정말 간절했던 것은 모토로라가 추진했던 이리듐 휴대폰이었다.

이리듐은 66개의 저궤도 통신위성을 사용해 전 세계 121개국에서 하나의 번호와 단말기로 통화가 가능한 서비스였다. 1989년 모토로라가 중심이 돼 추진된 이 사업은 히말라야, 대서양, 아마존 정글, 전 세계 어디서나 통화가 가능하다는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이 프로젝트에는 모토로라를 비롯, 일본의 DDI, 한국의 SK텔레콤 등 전 세계 20여개 회사가 참여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항하는 휴대폰은 장난감처럼 보였다. 도시의 제한된 지역에서만 통화가 가능하고 통화하는 동안 기지국이 변경되면 끊어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승부는 싱겁게 끝났다. 이리듐 전화의 1분당 5달러(약 6,000원)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던 것이다. 이리듐은 가입자 수 1만명에서 정체됐고, 1년이 안 된 1999년 8월, 44억달러 상당의 부채를 갚지 못하고 파산했다. 소비자는 기술보다 현실적 가치를 선택했다.

지금 한국의 가상현실(VR) 산업을 보면 이리듐이 겹쳐 보인다. 기술적 우위나 논리적 당위성만 가지고 밀어붙이는 것은 이리듐과 같다. 소비자에게 VR 영상을 보여주면 탄성을 지른다. 바로 옆에서 돌고래가 헤엄치는 듯한 영상은 감동이다. 그런데 그뿐이다. 콘텐츠는 더 이상 없다. 갤럭시 기어VR 같은 안경을 사서 어디에 쓸 지도 모른다. VR 영상 제작자는 더 당혹스럽다. 저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인 이창재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VR가 되면 감독의 의도와 달리 이용자는 자기가 보고 싶은 화면을 막 돌려서 보는데 이러면 스토리 전개가 전부 달라져야 한다. 즉 다중 구조의 스토리가 돼야 하는데 이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VR라고 해서 아무 영상이나 마구잡이로 찍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다.

온라인게임은 인간 사이의 연결이라는 가치를, 스마트폰은 물리적 공간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가치를 던져줬다. VR가 줄 수 있는 가치는 현실감과 체험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은 이런 가치를 실현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VR가 산업화되려면 비즈니스 모델도 등장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과금 모델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정도의 VR 콘텐츠에 돈을 내려는 유저는 없다. VR 이상의 재미를 제공하는 콘텐츠가 사방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동물머리 세 개를 맞추는 간단한 게임 애니팡도 중독자가 있을 정도다.

이제 VR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콘텐츠 개발, 타깃 유저와 장르 설정, 인프라 구축을 고민해야 한다. 한 예로 일본의 세가 온라인은 VR로 아이돌 가수의 공연을 보는 콘텐츠를 개발 중이다. 바로 1m 앞 무대에서 공연하는 자신의 아이돌을 보는 것은 팬들에게는 꿈 같은 일이다. 아마 기꺼이 비용을 지불할 것이다. 장르의 집중도 중요하다. 게임이라면 슈팅게임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1인칭 슈팅게임(FPS)은 ‘오타쿠(한국에서는 오덕후라는 우아한 이름으로 불리는)’의 놀이터다.

지금 한국의 VR 개화를 위해 중요한 것은 정부 관료의 개발 예산 따기나 삼성전자의 디바이스 판매 실적이 아니다. 미래 한국을 열어갈 수 있는 VR 전략의 수립인 것이다.

위정현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