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큰 주제가 아니라 소소한 일상을 들여다봐도 불안한 것은 마찬가지다. 믿었던 사람이 배신하고 내 삶의 견고한 토대가 돼줬던 환경이 흔들리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캠퍼스에 있는 학생들은 학점이 제대로 나올 수 있을까,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로 불안해한다. 직장인들은 직장인들대로 언제까지 다니는 직장을 계속 다닐 수 있을까 염려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녀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한다. 또 갑작스럽게 건강에 이상이 오기도 하면서 이 증상이 더 심화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여하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생은 늘 흔들림의 연속이다.
든든하다고 믿었던 토대가, 또 견고한 터가 속절없이 흔들리는 경우에 도대체 어찌해야 할까 하는 염려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알랭드 보통이라는 작가는 이런 인생의 현실을 직시하고 불안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통찰하고 ‘불안사회’라는 책을 출간, 불안사회는 결국 피로 누적사회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사실 인생 속에서 따져 보면 가장 불안하고 힘든 주제는 죽음의 문제다. 죽음을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까. 종교학적으로, 인문학적으로, 또 의학적으로 전문 영역에 따라 다양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늘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죽음의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늘 생각하는 나 나름의 정의는 이렇다. “죽음은 모든 것과의 관계단절이다.”
실제의 삶 속에서 죽음은 정말 모든 것과의 관계단절이다. 어느 수필가는 이렇게 썼다. “오늘 아침 함께 식탁을 대하던 사람과 더 이상 함께 밥을 마주 놓고 대할 수 없다는 것이 죽음이다.” 초등학교 때 집에 와서 3개월 정도 폐결핵으로 요양하던 둘째 누나가 세상을 떠나는 사건을 경험하면서 이 수필가의 글이 사실 그 자체라는 것을 절절하게 깨달았다. 그렇게 활달하고, 재기에 차고, 친절했던 누나가 미동도 없이 방 한 켠에 누워 있는 것을 경험하면서 죽음의 파괴력을 깨달았다. 누나가 앉아 있던 자리, 웃고 장난치던 모습, 그 밝은 농담공간은 죽음이 가져다준 차디찬 단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날카롭고도 냉정한 느낌을 주는 죽음 앞에서 모든 존재는 그 근간이 흔들리고 무너진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여전히 자신이 살아가야 할 길이 보이기 때문에 다시 추슬러 그 길을 가야만 하는 책무가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늘 이렇게 묻는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늘 흔들리는 삶의 현실 속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나름 고민하며 터득한 대답은 이것이다. 죽음보다 강한 것, 바로 사랑하는 것 외에 대안은 없다. 사랑은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마음을 열어 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 공간에 사랑하는 대상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랑의 대상을 마음속에 들여놓는 연습을 해보라. 마음을 활짝 열고 그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가 같은 공간에 없어도 그는 이미 나와 함께하는 존재다. 그가 훌쩍 내 곁을 떠나도 그는 여전히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점점 깊어 가는 가을, 존재의 근간이 흔들리는 불안함과 염려가 순간순간 엄습하는 세상이지만 그 속에서도 내 마음속에 안전하게 자리 잡은 사랑하는 이로 인해 다시 균형을 잡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이상화 드림의교회 담임목사·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