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2만여명 도심집회] 무너진 국가시스템에 분노 넘어 허탈...자발적으로 촛불 들고 나왔다"

성별·나이·직업 등 관계 없이
"대통령 퇴진·특검" 한목소리
외신도 "드라마같은 스캔들...
비밀스런 팔선녀 모임" 언급도

지난 29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최순실 게이트’ 관련 진상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하야 촉구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집회에는 성별, 나이를 불문한 각계각층의 시민 2만여 명이 모여 성난 민심을 드러냈다. 경찰은 이날 현장에 72개 중대, 약 8,000명을 투입했다. /연합뉴스


‘비선 실세’로 지목된 최순실(최서원으로 개명)씨의 국정농단 의혹이 제기된 뒤 맞은 첫 주말은 뒤숭숭한 시국만큼이나 쌀쌀한 가을 추위가 살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29일 청계광장을 중심으로 모여든 2만여 명 시민의 마음은 유례없는 국정농단 사건에 분노하며 한껏 뜨거웠다.

지난 29일 오후 6시 서울 청계광장 등 도심 곳곳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하야와 ‘최순실 게이트’의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민중총궐기투쟁본부 주최로 열린 이 날 집회에는 2만명(주최 측 추산, 경찰 추산 1만2,000명) 넘는 시민들이 참여해 뜨거운 분노를 표출했다. 성난 민심은 성별·나이·직업에 관계없이 하나로 일치했다. 수능을 20여일 앞둔 고교 3학년 학생부터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 부부 등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현장에 나와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특검을 통한 성역 없는 수사 촉구에 한목소리를 냈다.


고등학생 김모(18)양은 “지금 공부해서 하나를 더 맞고 틀리고는 이 상황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마음에 이 자리에 나왔는데, 부디 대통령이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줬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대학생 박모(23)씨는 “평범한 대다수 학생은 피땀 흘려 학점 하나 받기 위해 노력하는데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개명 전 정유연)는 대충 쓴 리포트로 학점을 받았다”며 “대통령은 물론 최순실과 관련된 배후 세력에 대한 철저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익명을 요청한 한 60대 남성은 “좌우와 진보·보수의 문제가 아닌 절벽 앞에 서 있는 국가 시스템, 국가 붕괴에 대한 우려 때문에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나왔다”고 말했다. 직장인 배모(32)씨는 “더 이상 뭘 믿고 어찌 살아야 할지 막막하지만, 이 위기를 넘고 다시 민주주의의 토대를 세우는 것도 결국 국민이라는 생각”이라고 전했다.

이날 시위에는 현 정부를 겨냥한 촌철살인의 시위 문구들도 등장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공시생들은 ‘최순실 공화국인 아닌 대한민국의 공무원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팻말을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금 내는 줄 알았더니 복채 내고 있었네’ 등의 문구로 검증되지 않은 인물(최순실)에 국정 운영이 좌지우지된 상황에 대해 개탄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날 오후 7시10분께 집회를 마친 시민들은 세종로사거리를 거쳐 청와대 방면인 광화문광장까지 행진했다. 이 과정에서 종로1가와 광화문광장 좌우 세종대로 전 차로가 한때 시위대에 점거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나 큰 충돌은 없었다. 경찰은 이날 72개 중대, 약 8,000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30일 전날 시위에 대해 “시민들이 경찰의 안내에 따르고 이성적으로 협조해줘 감사하다”며 이례적으로 입장자료를 발표하기도 했다.

주말 시내 곳곳을 달군 뜨거운 민심은 외신들의 이목도 집중시켰다. 워싱턴포스트는 “(박 대통령은) 비선실세, 정실 인사, 부당이득 등이 뒤엉켜 있는 드라마 같은 정치 스캔들에 휩싸였다”며 “이 드라마엔 심지어 비밀스러운 팔선녀 모임”도 등장한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도 “한국은 현재 무속인이라 비난받고 있는 의심스러운 조언자가 관여된 스캔들에 사로잡혀 있다”고 전했다. 대학생 서모(22)씨는 “교환학생으로 온 미국인 친구가 ‘Door Knob Power’(문고리 권력)이라는 게 도대체 뭐냐고 물어보기도 한다”며 “비선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이 나라를 놓고 왜 부끄러움은 국민 몫이 돼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자조했다.

회사원 양모(47)씨는 “수치스럽지만 대 위기가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최순실의 자진 귀국이 썩 매끄럽지는 않지만 전 국민이 분노하며 지켜보고 있는 만큼 명명백백하게 진실히 밝혀지고 1987년 이후 민주주의 근간을 다시금 다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주부 남모(39)씨는 “‘헬조선’이라는 자조와 허탈감 섞인 말이 아닌 내 딸에게 물려주고 싶은 대한민국이 됐음 한다”고 간절한 바람을 내비쳤다. /김민정·김정욱·최성욱·박우인기자 jeong@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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