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최순실 게이트’…국운을 위한 선택은

비선 실세 농단에 국가 존립 흔들
러 제정 무너뜨린 역사 잊지 말고
철저히 파헤쳐 반전 기회 삼아야

문성진 부장


포토라인은 의미가 없었다. 10월31일 오후3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타난 ‘비선 실세’ 최순실은 아무 말 없이 청사로 직행했다. 청사 내에 들어서서야 “죽을 죄를 지었다”고 말했다지만 국민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나라가 온통 ‘최순실 게이트’로 소란하다. 그동안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을 등에 업고 저지른 일은 국정농단, 축재, 권력남용, 특혜수수, 비밀누설, 인사개입, 배임과 횡령, 협박 등 일일이 꼽기 어려울 정도로 스펙터클하다. 아버지 최태민이 고(故) 육영수 여사의 현몽(現夢)을 앞세워 박근혜 큰영애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 40년을 이어온 최순실과의 인연과 국정농단 게이트. 어찌 민주화된 이 시대에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최순실과 그의 악행을 보고 있자면 기원전 3세기 중국 진나라의 환관 노애를 비롯해 100년 전 제정러시아의 그리고리 예피모비치 라스푸틴, 그리고 조선시대의 정난정과 진령군 등이 떠오른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 10년 가는 권세 없고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진리도 더불어 생각하게 된다.

진나라가 전국을 통일하기 이전 정력이 남달랐던 노애는 거짓으로 궁형을 받고 환관으로 궁에 들어가 진시황의 어머니인 태후 조희의 내연남이 됐다. 이후 장신후라는 봉호에 봉지까지 받았고 통제 불능의 권세를 누리며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노애는 궁궐의 대소사를 좌지우지하며 재산을 늘리는 데 혈안이었으며, 그 위세가 집안에 종이 1,000명이나 되고 식객도 1,000여명에 달할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그러나 노애는 거짓 궁형과 조반(造反)의 멍에를 쓰고 거열형에 처해졌다.


제정 러시아 시대 요승 라스푸틴은 황태자의 혈우병을 신비주의적 최면 요법으로 치유한 것을 계기로 권세를 얻은 뒤 국정 농단과 축재를 일삼았다. 장관들의 목숨과 주요정책의 방향은 라스푸틴의 손아귀에 쥐여 있었다. 그런 라스푸틴도 결국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한 의인들의 암살로 죗값을 치러야 했다.

조선 명종의 외삼촌이자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의 애첩 정난정은 기생이었다. 그는 궁궐을 드나들며 문정왕후를 도와 경빈 박씨에게 사약을 내리고, 을사사화를 일으키는 등 국정을 농단했다. 그러나 정난정은 숱한 비난 속에 자결하고 나라를 문란하게 했다는 오명을 남겼다.

무당 진령군(이성녀)은 임오군란 때 충주 장호원 충주목사 민응식 집으로 피신한 상태에서 목숨까지 위협받던 명성황후와 첫 대면에서 “8월에 보름에 환궁할 것”이라 단언한 것이 적중해 권세를 얻었다. 하지만 진령군은 국정농단과 인사 청탁, 부정 축재 끝에 옥살이와 재산 몰수, 쓸쓸한 죽음으로 최후를 맞았다.

인과응보다. 국정을 농단했던 이들 비선실세들은 하나같이 응분의 죗값을 치렀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유념할 부분은 비선실세의 국정농단을 어떻게 처리했느냐에 따라 나라의 운명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2,200여년 전 가짜 환관 노애의 전횡을 과감하게 처단하고 뿌리까지 도려낸 진나라는 국가 몰락의 위기를 넘기고 중국 대륙 통일이라는 위업을 이뤘지만, 100년 전 제정 러시아는 라스푸틴을 너무 늦게 응징해 나라가 망했다.

최순실 게이트는 한낱 사인(私人)이 대통령을 등에 업고 국정을 주무르고 각종 이권과 특혜에 개입했고 청와대와 정부 여당이 이를 방조했다는 점에서 국가의 존립을 흔드는 위협이다. 다만 그 모든 실체를 낱낱이 밝혀내고 적폐의 뿌리를 뽑을 수만 있다면 나라를 일신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 모든 선택이 지금 우리 앞에 있으며, 최순실 수사를 개시한 검찰은 그 출발점에 섰다.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국가의 적폐가 일소되기를 바라는 국민은 40여년 전 살아 있는 권력 다나카 가쿠에이 수상의 록히드 스캔들을 파헤쳐 신뢰를 회복한 일본 검찰을 기억하고 있다. /hns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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