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그룹 중 한 곳에서 경영계획 수립 업무에 관여하고 있는 한 사장급 임원은 2일 서울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보고서를 받아봐도 올해보다 내년이 좋아질 게 도무지 없어 보인다”며 이같이 털어놓았다.
통상 11월이면 주요 그룹 전략경영본부가 각 계열사의 내년도 경영계획 초안을 받아 확정 지어야 하는 시기인데 현재는 환율·유가·경제성장률 등 모든 면에서 불확실성이 워낙 커 경영 여건을 관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외부에서는 대기업들이 여유가 있는데도 구조조정과 같은 ‘감량’에 나선다고 보지만 내부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며 “아직 국내 기업 전반에 낭비요인이 많아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는 수준에서 내년에도 구조조정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10대 그룹에 속한 한 계열사 사업부는 최근 내년도 예산안 초안을 그룹에 올렸다 퇴짜를 맞았다. 더 비용을 절감할 부분이 있는 만큼 전체 예산 규모를 줄여오라는 게 그룹 재무팀의 지시였다고 한다.
이 사업부 관계자는 “올해 예산안 기준이 빡빡해 통과가 쉽지 않을 분위기”라고 말했다.
주요 대기업들은 대체로 내년 사업계획을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경영 환경이 예측조차 어려울 정도로 깜깜해 가능한 수비적으로 대응한다는 전략에 다른 것이다.
재계 1위인 삼성그룹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갤럭시노트7 생산 중단 사태가 빚어지면서 경영계획 수립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지고 있다.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브랜드명(名)인 ‘갤럭시’마저 포기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올 정도다.
전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차기작인 갤럭시S8의 출시 일정이 불투명해질 경우 이 안에 탑재되는 각종 반도체는 물론 배터리(삼성SDI), 기판(삼성전기) 등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은 통상 12월 사장단 경영전략회의에 발맞춰 내년도 경영계획을 확정하고 이어 연초 이재용 부회장에게 계열사 사장들이 보고하는 형식이지만 올해는 전반적인 일정이 뒤로 밀릴 수 있다.
2년 연속 판매량 목표 달성에 실패한 현대자동차그룹도 비상이 걸렸다. 올해 현대차그룹의 판매량 목표는 813만대였는데 최근 3·4분기 컨퍼런스콜을 통해 “800만대 판매도 어려울 수 있다”는 고백이 나왔다.
내년에도 시장 사정은 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 글로벌경영연구소는 내년 국내 시장 전체 판매량이 올해 180만대에서 176만대로 줄어들 것으로 최근 분석했다.
현대차 관계자는 “내년 판매 목표를 축소하거나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처럼 아예 발표하지 않는 방안도 고심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선업계는 생존을 최대 목표로 잡았다. 현대중공업은 최근 5년간 평균 수주량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75억달러어치 물량을 내년에 수주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중공업 역시 내년 수주 목표를 올해와 같은 53억달러 수준으로 잡았다. 이밖에 포스코는 내년에도 불확실성이 크다는 판단하에 철강제품뿐 아니라 ‘솔루션’을 함께 판매하는 마케팅 전략을 유지할 계획이다.
◇미래먹거리에는 과감한 투자=국내 대기업들은 다만 불투명한 경영 여건 속에서도 미래 먹거리에는 과감히 투자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이 직접 나서 “판을 바꿀 정도로 과감한 투자와 인수합병(M&A)을 서둘러 달라”고 주문했다. SK 관계사 최고경영자(CEO)들은 지난달 경기 이천시 SKMS연구소에서 열린 CEO 세미나에서 이 같은 경영 철학을 공유하고 다양한 ‘먹잇감’을 물색하고 있다. 중국에서 석유화학기업 지분 인수 및 전기차 관련 합작사업을 준비하고 있는 SK이노베이션이 선두 주자로 통한다. SK의 한 관계자는 “이르면 연내에 주요 계열사들이 M&A 소식을 시장에 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그룹 역시 최근 불미스런 사태에 따른 경영공백을 뒤로 하고 내년 공격적인 베팅을 준비하고 있다. 신동빈 롯데 회장은 지난달 경영쇄신안을 발표하면서 “앞으로 5년간 4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에 따라 검찰 수사 이후 중단됐던 M&A와 설비 및 시설투자 등이 집행에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구본준 부회장이 그룹 신성장사업추진단을 맡아 먹거리 발굴을 주도하고 있는 LG그룹 역시 투자에는 과감히 나설 예정이다. 주력 계열사인 LG화학은 오는 2020년까지 신성장동력인 전기차배터리에서 7조원의 매출을 올리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한화그룹 역시 지난달 일찌감치 사장단 인사를 마무리하고 한화테크윈 등 방산계열사의 사업영역을 재조정한 뒤 미래성장동력을 집중 발굴하는 방향으로 사업전략을 짜고 있다. /서일범·강도원·한재영·박재원기자 squiz@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