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 최고 책임자의 잘못에 대해 사과와 책임을 요구하는 일은 근대 정치에만 있지 않고 동아시아의 왕정시대에도 있었다. 왕정시대에 왕은 선거가 아니라 왕위 계승 원칙과 전임자의 지명에 의해 세습이 결정됐다. 이때 왕은 사직과 종묘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기나긴 학습을 통해 ‘준비된 왕’이 되는 절차를 겪어야 했다. 세자 신분에서는 서연(書筵)을 통해, 왕이 되고 나서도 경연(經筵)을 통해 왕이 왕답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추고 리더십을 발휘하도록 끊임없이 교육을 받아야 했다. 조선시대의 국왕도 경연에 빠지려면 그럴듯한 구실을 만드느라 골머리를 앓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왕위를 계승할 자격을 갖췄지만 능력과 리더십을 지니지 않았을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왕위를 계승한 왕 본인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들 모두 고통을 겪지 않을 수가 없다. 송나라의 휘종(徽宗)은 그림에 조예가 깊어 실제로 궁중 화가들에게 그림을 지도하고 각종 문화재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해 금나라와 대결에서 패배했다. 자신도 머나먼 객지에서 사망했을 뿐만 아니라 나라도 수도를 옮겨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휘종은 차라리 왕이 아니라 예술가가 됐더라면 송나라의 국민과 종묘사직에 좋았겠지만 왕이 되면서 개인과 국가의 불행을 피하지 못했다.
이렇게 왕의 자격과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왕위에 오르면 단명하거나 도중에 마음을 고쳐먹게 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즉 왕이 백성들에게 고통을 일으키는 몸통이지만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었다. 맹자는 그런 왕에게 책임을 물어 자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왕정시대에 신하와 일반 백성이 왕을 몰아냈다는 하극상의 오명을 받을 수 있다. 맹자는 역성혁명이 왕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는 무능력한 사람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다고 주장했다. 이때 맹자는 왕의 권좌에 있지만 무능한 사람을 더 이상 왕이 아니라 일부(一夫)라고 불렀고 순자는 독부(獨夫)라고 불렀다. 일부나 독부가 국정을 수행할 수 없으면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당연히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무능한 사람이 다수의 국민들에게 피해와 고통을 주는 일을 늦었지만 종식 시킬 수 있다. 맹자는 자격과 자질을 갖춘 왕과 무능한 일부를 엄격하게 구분했다. “사람을 해치는 자는 도적이고 정의를 해치는 자는 강도일 뿐이다. 도적과 강도를 일삼는 사람은 왕의 자리에 있다고 해도 필부에 지나지 않는다. 필부의 폭군을 처벌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왕을 처벌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일부와 필부는 누구도 원하지 않은 길을 고집스레 걸어가기 때문에 결국 파멸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도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다면 본인이 독부와 일부의 형태를 닮으면서 독부와 일부의 사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그토록 강조하던 비정상의 정상화이기 때문이다.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