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그 얘기를 들었다면 십계명 판을 다시 깨트렸을 겁니다.” 32세의 젊은 과학자 하임 바이츠만(Chaim Weitzman)이 26살 많은 전 영국 수상 아서 벨포어에게 한 말이다. 바이츠만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벨포어가 수상 시절 발언을 다시금 꺼냈기 때문. 벨푸어가 ‘영국 식민지인 우간다에 유대민족 국가를 세우는 방안이 현실적’이라고 말하자 바이츠만이 되물었다.
‘누군가 선생께 런던 대신 파리를 준다면 받으시겠습니까?’ 벨푸어는 웃으며 답했다. “하이츠만 박사, 우리에겐 이미 런던이 있소.” 바이츠만이 바로 반박했다. “그렇지요. 한데 우리에게는 예루살렘이 있었죠. 런던이 늪지대였을 때 말입니다.” 이상의 대화가 진행된 시기는 1906년.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 벨푸어와 시오니스트 운동(조상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돌아가 유대 국가를 세우자는 운동)의 청년 지도자 바이츠만과의 만남은 역사를 바꿨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영국 외무장관으로 근무하게 된 벨푸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국가 설립’을 약속하는 편지를 유대인 부호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보냈다. 서한의 내용은 영국이 견지해온 중동정책, 즉 전쟁이 끝나면 아랍민족을 독립시켜 주겠다던 정책과 상반된 것이었다. 청년 바이츠만의 희망은 벨푸어와 처음 만난지 11년 후에야 이뤄진 셈이다.(바이츠만이 1917년 벨푸어와 담판을 통해 선언을 이끌어냈다는 자료와 서적이 국내에 의외로 많다. 잘못 알려진 것이다.)
다만 벨푸어가 바이츠만을 의식한 점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바이츠만이 영국의 전쟁 수행에 절대적인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잠수함의 봉쇄로 화약 원료인 칠레초석 수입이 끊겨 탄약과 폭탄 부족에 직면한 영국을 위기에서 구해줬다. 폭탄 제조에 필수적인 아세톤을 나무에서 추출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생산량이 워낙 소량인데다 영국은 늘 목재가 귀한 나라였다. 바이츠만은 녹말에서 아세톤을 뽑아내 고성능 탄약 원료를 생산하는 기술을 찾아 벨푸어가 전쟁장관으로 재임하던 영국 정부에 넘겼다. 바이츠만의 공로가 1917년 영국의 이스라엘 건국 지원 약속인 벨푸어 선언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
어떤 유대인보다도 유대 국가 건설에 공이 큰 바이츠만의 출생지는 러시아. 1874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포그롬(러시아에서의 유대인 박해)을 피해 스위스와 독일의 대학에서 화학을 배웠다. 1900년 박사학위를 받고 제네바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1906년 영국 맨체스터대학으로 옮기며 유대 민족주의자로서의 본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영국은 유대인들을 부담스럽게 여겼지만 바이츠만 만큼은 살갑게 대했다. 전쟁에 큰 공을 세운 바이츠만은 대화 상대방을 이해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타협과 설득의 달인이었던 바이츠만은 1919년 영국군 정보장교 로렌스(아라비아의 로렌스)와 함께 아랍의 실권자인 파이잘 왕자와 만나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정착을 장려한다’는 약속까지 얻어냈다.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급증한 것도 이때부터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 선언된 지 11분 만에 트루먼 대통령이 중동의 석유 이권을 의식한 마셜 국무장관 등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승인을 발표한 배경에도 바이츠만의 인맥이 작용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바이츠만과 면담조차 거부했으나 어려웠던 시절 유대인 친구가 부탁하자 태도를 바꿨다. 바이츠만과 유대인 조직의 정보력이 그만큼 뛰어났다.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바이츠만은 민족 간 화합에 전력을 기울였다. 권력에 집착하지도, 분란을 야기하지도 않았다. 좌우정당은 물론 아랍인까지 아우르는 평화 정책이 실권을 가진 강경 좌파 벤구리온 총리에게 막히자 깨끗하게 물러났다. 벤구리온과 바이츠만의 견해가 일치했던 부분은 딱 한 가지. 동족을 배반했던 나치 부역자들에게 대한 처결에서는 여야가 따로 없었다.
바이츠만은 사임한 뒤 연구소 일에 매진하며 후진을 키웠다. 1952년 11월9일 바이츠만은 76세를 일기로 사망했지만 그의 이름이 남아 있는 바이츠만대학과 연구소는 농업과 화학에 관한 세계적 연구기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바이츠만은 특히 고등 교육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대학 없는 유대인 국가는 카지노 없는 모나코와 다름 없다’며 1918년 히브리대학교의 초석을 놓았다. 이스라엘의 9개 대학은 서구의 어느 대학에도 뒤지지 않는 수준을 자랑한다. 초대 대통령 바이츠만의 관심 분야였던 이공계와 농업 부문이 특히 강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 벨푸어 선언을 전혀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다. 유대인 역사저술가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가 지은 ‘에루살렘 전기’에 따르면 벨푸어 선언은 러시아계 유대인들을 볼셰비즘에서 떼어놓기 위한 목적에서 추진됐다. 서한의 내용이 알려지기 하루 전에 레닌은 권력을 잡았다. 사이먼 몬티피오리는 이 책에서 ‘레닌이 며칠만 일찍 움직였더라면 벨푸어 선언은 결코 발표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