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김영란법 그리고 가을운동회

‘둥둥 북소리에 만국기가 오르면 온 마을엔 인화(人花)가 핀다. 연신 터지는 출발신호에 땅이 흔들린다. 골목엔 자잘한 웃음이 퍼지고 아이들은 쏟아지는 과일에 떡타령도 잊었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어릴 적 운동회의 추억을 이성교 시인은 이처럼 멋들어지게 표현했다.

‘코스모스가 우거져 피어 있는 운동장 가운데 높다란 장대를 세워 태극기를 달고, 홍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저마다 빨간 얼굴이 돼 응원하는 모습이 선하다. 농촌의 운동회는 어린이들의 큰 행사요, 온 面民(면민)의 큰 행사다.’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인 후석(後石) 천관우 선생이 ‘신세시기(新歲時記)’ 가을 편에서 그려낸 추억과 풍경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운동회’. 어린 시절 누구나 간직하고 있는 마르지 않는 추억의 샘물. 굳이 여러 시와 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운동회는 학생들만의 놀거리가 아니라 마을과 학교 전체의 축제였다. 아이들의 순수한 동심이 중심이 된 ‘신바람’의 장이었고 일상에 쪼들려 평소 왕래가 뜸하던 마을 어른들이 모여 정을 나누는 ‘만남’의 장이기도 했다.

김밥과 사이다, 감나무 잎에 싼 자반고등어, 밤·고구마 등등. 우리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위해 밤늦도록 음식을 준비하셨다. 어느 학교에서나 ‘운동회 날에는 꼭 비가 온다’는 믿고 싶지 않은 전설(?) 때문에 기도하느라 뜬 눈으로 지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운동회는 18세기 영국 공립학교에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1746년 웨스트민스터스쿨에서 교내 경기로 크리켓 대회가 열렸고 1837년에는 이튼스쿨에서 요즘의 운동회 격인 육상경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896년 5월2일 동소문 밖 삼선평영어학교에서 처음 시작됐다고 하는데 영국이나 미국의 ‘플레이데이’처럼 승부를 겨루는 대신 학생과 학부모·선생님 모두가 참여해 한바탕 축제의 장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름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운동회가 사라지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 2014년 전국 5,882개 초등학교 가운데 487개 학교에서 아이들의 함성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9월 시행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은 운동회 풍경을 ‘낯설게’ 바꾸고 있다.

학부모들이 김밥·치킨 등의 간식거리를 선생님과 나누던 모습은 사라졌고 급식으로 식사를 하거나 아예 점심시간 전에 운동회를 끝내는 학교도 생겨나고 있다.

공부하기도 바쁜 마당에 뛰어놀 시간이 어딨냐며 펄쩍 뛰는 학부모들과 ‘김영란법’에 저촉될 문제 발생 소지의 ‘싹’을 자른 학교들의 입장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좁은 교실과 스마트폰 안에서만 살고 있는 아이들이 추억을 먹고 사는 나이가 됐을 때 넘겨볼 마음속 앨범이 사라지는 현실이 씁쓸한 요즘이다.

/김경훈기자 styxx@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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