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끝난 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미국은 ‘미국적 가치의 확산’을 핵심이익으로 삼아왔다. 미국적 가치는 자유무역·민주주의·인권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은 각국에 무역장벽을 허물고 자유무역협정(FTA)을 확대하자고 요구해왔으며 중동 등에서 인권을 침해하는 권위주의 정권을 해체하기 위해 막대한 군비를 지출하며 ‘세계의 경찰’ 역할을 자처해왔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미국의 가치를 중시하는 기조는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국제사회와 함께 최소한의 군사개입을 하는 ‘오바마 독트린’을 발표하고 외교의 축을 중동에서 아시아로 옮기는 ‘아시아 재균형’ 전략을 도입하며 변화를 줬지만 여전히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체결 등을 추진하며 미국적 가치 확산에 힘썼다.
이러한 미국의 핵심이익은 다른 국가들의 핵심이익과 공존 또는 충돌하면서 현재의 국제질서를 만들어냈다. ‘하나의 중국’을 핵심이익으로 하는 중국과는 소수민족 인권과 대만·홍콩의 민주주의를 놓고 대치했으며 ‘구소련 지역 패권 유지’를 통해 강한 러시아를 만들려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는 우크라이나 사태 등을 놓고 갈등을 빚었다.
반대로 ‘보통 국가로의 전환’을 꿈꾸는 일본과는 가장 끈끈한 동맹이 됐다. 일본은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충실한 대리인을 자처하는 대신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받았고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성사시켜 패전국의 멍에를 지웠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레이스 내내 미국적 가치의 대명사 격이었던 자유무역과 인권에 철저하게 반기를 들었다. 대신 자국의 국방은 강화하면서도 국제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며 동맹들의 ‘안보 무임승차’에는 메스를 대겠다고 공언했다. 이는 미국의 핵심이익이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뜻한다.
리처드 닉슨 미 전 대통령과 함께 ‘닉슨 독트린’을 창시했던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10일(현지시간) 미 시사잡지 애틀랜틱이 공개한 인터뷰에서 “세계 2차대전 이후 우리는 평화로운 질서에 대한 비전이 있었으며 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며 “미국의 합의가 이 정도로 도전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자국의 이익을 새로운 핵심이익으로 들고 나온 트럼프 시대에는 모든 국제질서가 다시 짜여질 것으로 보인다. 각자의 핵심이익을 두고 대립했던 국가들이 새로운 균형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의 경우 ‘하나의 중국’이라는 핵심이익만 지켜준다면 미국의 무역 불균형 개선 등의 문제를 큰 틀에서 양보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정재홍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중국은 핵심이익인 영토주권에 관한 남중국해 문제에 대해서는 타협할 수 없지만 무역 등 경제 분야에서는 미국과 충분히 협력할 수 있다”며 “앞으로 미중 관계에 변화가 나타날 것”이라고 밝혔다. /연유진기자 economicu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