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립 국제부 차장
“소규모 시위대들이 우리의 위대한 국가를 향한 열정을 보였다는 사실이 기쁘다. (이들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에 반대하는 시위가 미국 전역으로 확산된 11일, 트럼프 당선인이 트위터에 이 같은 메시지를 남겼다. 불과 하루 전 “언론이 선동한 전문 시위꾼들이 항의를 하고 있다. 매우 불공정하다!”고 불만을 터뜨린 것과 완전히 달라진 반응이다.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5일. 불과 며칠 전까지 유세장에서 삿대질과 난폭한 언어를 동원하며 승리를 거머쥔 ‘승부사’ 트럼프는 이제 변신을 꾀하기 시작했다. 미국인의 분열을 선동하던 그는 언제부터인가 ‘화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물론 전 세계를 기겁하게 만들었던 극단적인 공약들도 어느 정도 수위가 조절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선거 후 감옥에 보내겠다”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사법 처리 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현안들이 우선”이라며 슬쩍 말꼬리를 흐리고 있다. 대선 승리라는 공화당 후보로서의 목적을 달성한 트럼프는 이제 대통령 당선인으로 현실적인 국정 운영이라는 새로운 승부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 같다.
문제는 그가 직면한 새로운 도전이 지금까지의 승부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이라는 거대 국가를 책임지게 된 트럼프는 분열된 공화당과 야당인 민주당, 기존 정치에 성난 백인 지지층과 ‘트럼프는 내 대통령이 아니다’라고 외치는 나머지 절반의 미국인들, 트럼프호(號) 미국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계 각국의 틈바구니에서 최고 난도의 줄타기를 해내야 한다. 가령 누그러진 트럼프의 태도는 그에게 반대하는 미국인들과 국제사회의 불안감을 다소 덜어줄 수도 있지만 오히려 반발심을 키울 수도 있다. 실제로 트럼프의 유화 제스처에도 반트럼프 시위는 연일 확산되고 있다. 그의 태도 변화는 ‘아웃사이더’로서의 도발적 발언과 과감한 정책 약속에 열광했던 핵심 지지층에 배신감과 실망감을 안겨줄 것이 뻔하다.
모두의 허를 찌른 트럼프의 승리는 기존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염증과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고조되는 박탈감 등 격변하는 민심을 기존의 정치인들이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트럼프와 종종 비교되는 이탈리아의 포퓰리스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트럼프의 승리에 대해 “‘정치적 올바름(being politically correct)’이 유권자들의 요구에 부합한다고 생각하는 좌파의 전형적인 실수”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했다.
옳은 얘기다. 그리고 많은 평론가가 지적하듯 트럼프의 승리는 한국을 비롯해 기존 정치가 몰락해가는 세계 각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선거 승리가 끝은 아니다. 대선에서 승리한 ‘선거의 여왕’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3년 만에 국정이 파탄 지경에 이른 한국의 현실은 ‘올바름’보다는 승리에 집착하는 트럼프 당선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신경립기자 kls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