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전기차배터리 한국기업 봉쇄] 높아지는 '배터리 만리장성'..."규제 불똥튀나" 他업종도 초긴장

"자칫하다 큰 손실" SK이노 현지 투자 논의 중단
LG화학·삼성SDI 등 中시장 점유율 벌써 하락세
정부 통상문제 대처 능력 상실...기업들 속수무책

삼성SDI 시안 공장 전경. /사진제공=삼성SDI
LG화학 난징 공장 전경. /사진제공=LG화학
SK이노베이션은 최근 중국 전기차 배터리 공장 투자 논의를 중단했다. 이 업체는 베이징전공·베이징자동차 등과 지난 2014년 중국 합작 법인(BESK)을 세우고 올해 말까지 대규모 전기차 배터리 공장을 착공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한국 업체들을 향한 산업장벽을 갈수록 견고히 쌓는 것을 보며 관망세로 돌아섰다. 배터리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 정부가 한국 기업을 배제시키며 현지 고객사가 줄줄이 이탈하는 상황에서 대규모 공장을 투자했다가는 자칫 큰 손실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기업들은 특히 배터리 제조사들이 반드시 자국에 지어야 할 설비 규모의 하한선을 중국 정부가 대거 올리는 등 고강도 산업 규제안이 현실화하자 이런 움직임이 다른 업종으로 확산될지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중국의 금한령(禁韓令·한류금지령) 움직임 등 한국 정부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보복조치가 문화에 이어 경제 분야에까지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갈수록 높아지는 ‘배터리 만리장성’=중국 정부가 배터리 기업들의 중국 내 최소 설비 규모 하한선을 40배 높여 잡은 ‘자동차 배터리 업종 규범조건(모범기준)’의 내년도 개정안을 들고 나오자 한국 기업들은 뒤통수를 맞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중국 공업신식(정보)화부가 규범조건을 만족한 업체들의 명단을 1~4차까지 발표하는 동안 LG화학·삼성SDI 등 한국 업체는 한 곳도 끼지 못했다. LG화학과 삼성SDI가 배터리 전문조사기관 내비건트리서치의 전기차 배터리 업계 평가에서 각각 1위와 3위를 차지할 정도로 역량을 갖췄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분히 자국 산업을 보호하겠다는 중국의 의지가 드러난다.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배터리 규범조건 4차 심사가 6월 있었기 때문에 5차는 9~10월 중 열릴 것으로 예상해왔다”며 “심사가 특별한 이유 없이 늦어지는 상황에서 규범조건마저 강화돼 무척 난감하다”고 토로했다.


일각에서는 중국 정부가 친환경 배터리에 지급할 보조금 예산이 부족해 외국 기업을 더욱 배제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업계는 중국 정부가 규범조건 인증을 얻지 못한 배터리 기업에 대해서는 오는 2018년 1월부터 전기차 관련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규범조건 개정안을 보면 리튬이온배터리 제조사는 현행 0.2GWh로 설정된 중국 내 생산설비 최소 규모를 8GWh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LG화학·삼성SDI·SK이노베이션 같은 한국 기업은 단기간에 중국 공장 설비를 2~3배 늘려야 하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 기업 중국 점유율 벌써 하락세로…연쇄 타격 입나=이미 중국 전기차 기업들은 공업신식화부 인증을 통과하지 못한 한국 업체들과의 거래를 중단하고 있다. 7월에는 중국 장화이기차(JAC)가 삼성SDI 배터리를 탑재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형 전기차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중국 1위의 버스·트럭 제조사인 ‘위퉁’과 10위권 트럭 제조사 ‘포톤’도 안전 문제를 이유 삼아 자사 전기버스에 탑재하던 삼성SDI의 배터리 공급을 멈춰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공업신식화부는 올 들어 9월까지 중국에서 팔린 전기차가 28만9,000대, 전기차 배터리 출하량은 12GWh에 이른다고 밝혔다. 이는 같은 기간 미국·유럽에서 팔린 전기차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다. 세계 최대 전기차 시장인 중국에서 한국 배터리 업계가 현지 정부의 규제 장벽을 넘지 못하고 주도권을 잃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물론 한국 정부조차 중국의 강고한 배터리 만리장성에 맞설 뾰족한 수가 없는 형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휘말리면서 외교·통상 문제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경제 분야의 보복 움직임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당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에 진출한 한국 배터리 업계는 그야말로 사면초가”라며 “중국의 배터리 산업 장벽이 장기간 공고해질 것이라는 우려만 할 뿐 별다른 대책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제단체의 한 관계자는 “자동차 등 다른 업종까지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관료들이 손을 놓고 있더라도 기업의 미래와 결정적으로 연결된 부분만큼은 소극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베이징=홍병문특파원 이종혁기자 hbm@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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