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노는 건 늘 좋다. 사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다. 잉여롭게 놀 때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몸은 혼자 있어도 온라인으로 전우들을 만난다. 오버워치를 신나게 하다가 영혼의 전우들이 없을 때는 배틀필드나 GTA를 한다.
아! 또 있다. 주식…!(‘폭망’이라 이젠 쳐다보기도 싫다).
금요일 밤 침대에 누웠던 딱 그 차림으로 주말 내내 있어도 누구 하나 신경 안 쓴다.
혼자 있는 게 심심하다 못해 질리는 날이 온다. 물론 혼자 잘 노는 거랑 여자친구를 만나고 싶은 건 별개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 군대 동기놈한테 카톡이 온 거다.
우리 수컷들은 카톡 프사 속 얼굴을 뜯어보며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폭풍칭찬을 하고 개저씨 같은 직장상사의 아재개그가 얼마나 진화를 거듭했는지 썰을 풀어내며 여러 단계를 밟을 필요가 없다. 그냥 직진이다.
동기 “소개팅 할래?”
나 “예쁘냐”
동기 “ㅇㅇ”
이 자식은 훈련소 시절 원더걸스가 처음 나왔을 때(응답하라 20070210이여...) 선예보다 소희가 이쁘다는 데 의견을 일치했던 놈이다. 이 녀석 취향은 내가 인정한다.
그리고 사진이 왔다.
# 설렘과 실망은 함께 온다. 이건 불변의 진리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제대로 준비성 있는 남자다. 여자사람친구 몇 명에게 물어보고 장소는 요즘 핫하다는 연트럴파크(연남동+센트럴파크)가 턱하니 펼쳐지는 홍대입구 3번 출구로 낙점이다!!!
(물론 당산역에 살고 있는 그녀를 최대한 배려했다. 으핫핫!!! 내 자취방 왕십리에서도 한 방에 갈 수 있다) 오늘 분위기만 좋으면 저 연트럴파크에 앉아서 재잘거리는 연인들 틈에 살짝 껴볼까.
만날 시간 직전까지 분위기 좋은 태국요리집이랑 삼겹살 파스타를 판다는 그럴듯한 집까지 두어번 스캔을 마쳤다.
남자들이 소개팅에 파스타집만 간다는 건 오해다. 물론 나도 물릴 때까지 먹어봤다 그 파스타. 그러고 나면 인도요리로, 베트남요리로... 미식기행을 하며 살 길 찾는다ㅎㅎ
카톡이 온다.
두킁두킁두킁
여자 : “저 이제 에스컬레이터 타고 올라가요ㅋ”
언제나 기분 좋은 긴장감
‘네 곧 봬요’ 답장을 보내기도 전에 실루엣이 나타난다.
(그녀 오기 20미터 전)
1차 스캔 “........”
(그녀 내 앞에 서 있다)
2차 스캔 “.................”
나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이 와중에 매너는 좋다)”
그리고는 가볍게 동기놈에게 카톡을 보낸다.
갑자기 미리 지도까지 찾아봤던 맛집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줄 안 서도 되는 집에 들어가서 빨리 끼니를 때우고 싶은 마음뿐.
맘이 착잡하다.(대체 사진 속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거야??)
살짝 손등에 가려진 하관을 못 본 나의 부주의인가, 얼굴 각도가 빛에 따라 달…달라지나 ... 아니다... 프사 성형이 심했던거다 ㄷㄷㄷ...
10년 간의 소개팅 경험으로 나에게도 취향이라는 게 생겼다. 물론 남자라면 ‘백이면 백’ 고개를 끄덕거릴 취향이다.
솔직한 맘으로 나이는 어렸으면 좋겠다. 너무 어린 여자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내 쪽에서 부담스럽다.
사회생활도 일이년 해보고 어느 정도 바쁜 여자가 좋다. 너무 바쁘지 않은 여자는 나만 바라보잖아?(배가 불렀다..내가 봐도 ㅎㅎ)
두둥! 다시 돌아가서 보자면 내 스타일이 결코 아니었다.
외모 SKIP!!
다리 SKIP!!!!!!!!!(난 얼굴 다음으로는 다리가 이쁜 여자한테 끌린다. 이건 당당한 개취다)
목소리 해당없음!!!
사실 내 스타일이기만 하면 귀여운 목소리는 귀여워서 좋고, 보통이면 평범해서 좋고, 허스키하면 섹시해서 더 좋다.
이때 나의 선택지는 하나다. 괘씸한 주선자놈이라도 친구 매너 없다는 얘기는 듣게 할 수 없다. 그래도 신중하게 분위기를 띄워본다.
혹시나 엄청나게 맞는 구석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아직 최후의 반전을 노려볼 수는 있잖아? (난 천성을 긍정으로 타고났나 보다! 짜식!!)
여자 “괜찮아요”
(잠시 정적)
나 “부산 다녀오셨다고요? 바다는 보고 오셨어요?
여자 “네 봤어요”
나 “슈랑 유진은요?”
여자 “네? 아……”
………침묵………
아 최악이다. 이 여자 리액션조차 사망각이다……… 차라리 재미없다고 반응을 하라고!!!(ㅂㄷㅂㄷ)
내 아재개그는 웃기려고가 아니라는 말이다. 너의 반응이 어떤지를 보려는 거란 말이다!!!!
리액션 하나에도 니가 얼마나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 잘은 웃는 지가 난 그게 궁금한 거다
오늘따라 뿌빳뽕커리는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맛으로 다가온다. 그래도 난 집중해서 먹는다. 아니면 리액션도 없는데 계속 말을 해야 하니까...;;;
음식은 코로 넘어가는 지 입으로 넘어가는 지 치맥이 간절하다. 집에 갈 때는 편의점에 들려서 오징어 다리에 맥주로 위안을 받아야겠다. 컵라면도 땡긴다.
또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한 두시간이 끝났다.
# 또 다시 내년을 기약하며!!
올해도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의 유일한 소득은 4캔에 만원이 안 되는 해외맥주다. 까만 비닐 봉다리를 들고 터덜터덜 돌아가는데 눈앞에 #하나무라 벚꽃이 스쳐간다.
이 시간에 차라리 오버워치를 하면 하나무라에서 벚꽃구경을 했단 말이다아 하핳허ㅏㅎㅎ핳ㅎ
역시 내년 봄에도 난 오버워치로 벚꽃놀이할 각이다........
‘까똑’
동기(주선자) “왜?”
나 “몰라서 묻냐”
동기 “야 걔 정도면 만나볼만 하지... 니 주제를 생각해라”
나 “내 주제에 무슨 소개팅이냐ㅡㅡ 평생 혼자 살란다”
동기 “걔는 너 맘에 든다는데... 연락 기다린대ㅋㅋㅋㅋ”
후덜덜..... 이 여자가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한다. 근데 전혀 고맙지가 않다
/소개팅이버거운남자 sednew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