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고 재밌는 허당 소년이죠.” 박정민이 대본에서 느낀 로미오는 달랐다. ‘내 이름 버리고 그대를 갖겠다’고 외치는 로맨티스트요, 사랑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열정남,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떠오르는 미남의 표상과는 또 다른 캐릭터였다. “실연의 아픔을 지닌 채 파티에 갔다가 더 예쁜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해요. 허둥대며 유모에게 (줄리엣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요. 이런 16세 소년을 보면서 ‘지금껏 알고 있던 게 (로미오의 이미지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죠.”
배역에 빠져드는 데 꽤 긴 시간이 필요한 배우다. 이번엔 그 속도가 유독 더뎌 압박감까지 느끼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들이 건넨 숙제 탓이다. 산문집을 낼 만큼 글쓰기를 즐기는 박정민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자신의 감정과 상황을 정리하는 데 익숙하다. ‘단어로 된 음악’이라 불리는, 화려한 수사와 리듬감 충만한 셰익스피어의 대사는 그래서 더 낯설다.
그는 “보통 영화는 대사가 현대의 것인데다 내 입에 맞게 조금 바꾸어도 되지만, 이번 작품에선 그럴 수가 없다”며 “캐릭터도 나와는 너무 달라 더 어려운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표현은 이렇게 해도 ‘로미오와 줄리엣’의 영문 원서는 물론 20년도 더 된 셰익스피어극단의 워크숍 영상까지 찾아보며 대사의 맛과 멋을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상대역인 문근영은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숫기 없어 사람과 친해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박정민이지만, 문근영과는 일찌감치 연습을 시작해 많이 편해졌다. “둘이 상의하고 이런저런 시도도 함께 하며 의지하고 있어요. 얼마 전엔 근영의 제안으로 로미오가 줄리엣 집 발코니 아래서 고백하는 장면을 연습실 밖 난간에서 연습해보기도 했죠.”
박정민은 2014년 극단 ‘경’(鏡)을 만들고 ‘G코드의 탈출’이란 공연을 올리는 등 연극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서 연기과로 전과한 이유도 연극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4년간 월간지에 칼럼을 쓰고 그 글을 묶어 산문집(쓸만한 인간)을 낼 만큼 필력도 갖춘 그는 “남에게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틈틈이 희곡도 쓰고 있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도 ‘써보고 싶은 캐릭터’를 발견했다. 바로 줄리엣의 약혼자인 패리스. “패리스가 작품에서 크게 주목받지는 못하지만, 잘 뜯어보면 정말 웃긴 배역이에요. 여러모로 완벽해 보이는데 뭐 하나 제대로 안 풀리고, 끝내 얻는 것 없이 로미오 손에 죽죠. 공부는 잘하는데 연애는 못하는 현대의 인물로 풀어내 코미디극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의 대본 한쪽엔 ‘패리스 외전’이란 메모가 적혀 있다.
대본을 볼 때마다 새로운 게 눈에 들어와 ‘아차’하고 원점으로 돌아가길 반복하고 있단다. 배우는 괴로울지언정 “관객에겐 많이 웃을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는 게 고민 많은 로미오의 장담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비극이 아닌 희비극이에요. 고전을 본다는 생각 대신 가벼운 마음으로 와서 즐겨주시면 됩니다.”
박정민의 ‘색다른’ 로미오는 오는 12월 9일~2017년 1월 15일 서울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만나볼 수 있다.
/송주희기자 ssong@sedaily.com 사진제공=샘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