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전에이블의 ESP는 이런 여러 단계들을 하나의 공정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고안했다. 에폭시가 환원 용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잔류물이 남지 않아 세척을 생략할 수 있는 것. 또 다른 강점은 반복되는 구부러짐에도 뛰어난 접착력을 유지한다는 점. 이는 기존 전자제품의 얇은 기판이 휘어져버리는 불량을 막을 뿐만 아니라 특히 웨어러블 전자기기나 플렉서블 디스플레이 같은 미래형 첨단분야에서 필수적인 특성이다.
이 같은 차별성에 힘입어 호전에이블 제품은 국내 제조사들뿐만 아니라 이미 해외에서도 이름을 알리고 있다. 최근 일본에서 열린 전시회는 호전에이블이 ‘세계 최초 에폭시 솔더 페이스트 상용화’를 세계에 알리는 무대였다. 앞서 연구개발에 돌입했지만 끝내 제품화에는 이르지 못한 외국 경쟁기업과 관련학과의 교수들이 호전에이블 부스를 찾아 문제해결 방법을 묻는 모습이 전시회 내내 연출됐다.
호전에이블의 이야기는 2006년 시작된 ETRI의 패키지 전극소재 개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연구책임자였던 문 대표는 7년여의 연구 끝에 전극소재 국산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중소기업에 이전된 그의 기술은 사업화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사장될 처지에 놓인다. 개인적으로는 연구원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금전적 보상도 따랐다. 하지만 자식 같은 기술이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마저 얻지 못하는 모습을 봐야 하는 건 영 씁쓸한 일이었다.
문 대표는 2012년 1월 연구소기업 호전에이블을 설립했다. 호전(淏鐫)이란 이름에 ‘순수한 연구의 열정을 가치 있고 유용한 제품으로 구현 하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창업만 하면 금세 제품화 할 것 같았던 기대는 몇 개월 만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막상 고객을 찾아 그들의 요구사항을 듣다보니 실험실에서는 보지 못했던 문제들이 하나 가득이었다.
문 대표는 “연구원 입장에서 볼 때는 소재 특성과 물성만 완료되면 개발이 다 끝난 줄 알았다”면서 “하지만 실제 산업현장의 지적은 생산성, 보관성, 하다못해 색상까지 끝이 없었다”고 말했다. 고객은 요구조건 10가지 중 하나만 충족시키지 못해도 구입을 꺼려했던 것.. 전자기기 분야가 워낙 민감한 작업이 요구되는 데다 안 써본 제품을 썼다가 자칫 오류라도 발생할까 걱정했던 것이다.
제품 홍보를 위해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현장을 찾아다녔지만 보수적인 시장은 검증이 안 된 호전에이블에게 쉽사리 문을 열지 않았다. 자만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문 대표는 연구소 기술의 우수성보다 시장요구를 충족하는 게 먼저라는 것을 착안했다.
아침저녁으로 현장을 찾아 자사 기술의 문제점을 경청하고 돌아와 이를 제품에 반영할 방법을 찾아 직원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렸다.
문 대표는 “최종 제품화에 대한 믿음이 없어 투자 받기도 어려운 중에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의 지원과 외부연구과제들이 적잖은 힘이 됐다”고 말했다.
이 같은 노력덕분에 지난해 약 7억원, 올해 10억원의 매출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문 대표는 “소재 하나를 개발하고 이를 변형시키면 다양한 분야에 적용이 가능하다”면서 “세계시장에서 인정받는 패키지 접합소재 전문기업으로 성장시켜 나가는데 주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ESP 제품화로 마침내 시장에 출사표를 던진 호전에이블은 값비싼 은제품을 대체할 ECP(Epoxy Cu Paste), EFP(Epoxy Flux Paste) 제품을 추가로 개발해 자동차, 항공기 등 고신뢰성 요구 분야를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할 계획이다.
“기술이 아니라 제품을 가지고 창업해야”
“기술적으로는 성공이 당연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더군요. 제품화는 1 아니면 0인 이진법의 세계입니다. 고객이 원하는 1%가 부족하면 나머지 99%도 의미가 없게 됩니다.”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며 ‘기술사업화’의 진정한 본질을 몸으로 터득한 문종태 호전에이블 대표의 말이다.
문 대표는 “이 기술이 과연 제품화가 가능한지 먼저 검토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면서 “실제 관련업계의 동향과 요구사항을 먼저 파악하는 준비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표는 시장조사와 연구개발로 바쁜 중에도 여전히 접착소재 관련 커뮤니티와 연구소기업협의회 같은 창업선후배들의 모임을 빼먹지 않는다. 가벼운 식사와 담소 속에 실은 놓치면 안 될 중요한 정보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문 대표는 “커뮤니티는 시장과 나, 경쟁이나 협력관계가 될 기업과 내가 서로를 탐색하는 공간으로 창업을 하려면 누구를 만나야 하는지, 사업을 해야 되나 말아야 하나를 결정할 판단근거까지 얻을 수 있다”면서 “현장경험이 풍부한 인재를 커뮤니티를 통해 스카웃했는데 나중에 그가 보유한 인적·물적 네트워크까지 활용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연구원이라면 재직 중에 과제를 따는 경험도 자주 해보는 게 필요하다. 기술이나 제품개발뿐만 아니라 자금, 인력, 사업수주까지 창업 초기에 부딪히게 될 생소한 일들의 해결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 편집부/구본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