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홍우의 오늘의 경제소사(12월6일)
‘12시가 가까워 오자, 3,000명이 넘는 노무자와 여자들과 아이들이 역 앞 공터로 몰려나와 설 자리도 없어 옆길로 밀려 들어갔다. 줄지어 늘어선 기관총을 둘러싼 군인들이 길목을 모두 막고 버티고 있어 빠져 나갈 수도 없었다.’ 콜롬비아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 2014)의 1967년작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바나나농장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계엄령이 발동됐던 상황. 해산 명령이 떨어졌어도 군중은 역전 광장을 떠나지 않았다. 두 번째 경고에도 자리를 지켰다. 이어지는 마르케스의 소설. ‘14개의 기관총들이 불을 뿜었다. 처음에는 굳어버린 듯 아무런 반응도 비명이나 한숨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한쪽에서 찢어져 나온 죽음의 비명이 신비한 침묵을 깼다. 아아아악, 어머니! 지진처럼 진동하는 목소리, 화산 같은 숨소리, 홍수의 성난 부르짖음이 군중 한가운데서 폭발해 단숨에 사방으로 흩어졌다.…(중략)…무자비한 군대는 무릎을 꿇은 여자와, 그 여자가 있던 곳과, 높고 가뭄에 찌든 하늘과…너저분한 터전을 깡그리 쓸어내렸다.’
소설 속 주인공 중 하나인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가 시체 더미 속에서 살아나 고향인 세군도에 돌아와 중얼거린다. ‘아마 3,000명은 될 거야’. ‘뭐가요?’. ‘죽은 사람들 말입니다. 역 앞에 모였던 사람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다 죽었을 겁니다.’
어디까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마술적 리얼리즘’의 작가로 평가되는 마르케스가 ‘백년 동안의 고독’에 집어넣은 학살 장면은 ‘몽환적 묘사’ 같지만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콜롬비아 북부의 바나나 농장 밀집지역인 시에나가에서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다. 1928년10월6일 콜롬비아 정부군은 노동 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 3,000여명에게 기관총탄을 퍼부었다. 역사는 이를 ‘바나나 학살(Banana Massacre)’이라고 기억한다.
다만 사망자 수는 소설과 일치하지 않는다. 콜롬비아 정부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고 발표했다가 ‘군인 1명 포함 9명 사망’을 거쳐 최종적으로 ‘사망자는 46명’이라고 밝혔다. 사건의 배경과 전개, 파국에 이르기까지 깊이 개입했다고 의심 받던 보고타 주재 미국 대사관은 학살 이튿날 본국에 ‘콜롬비아 정부군 병사 한 명과 시위대 500~600명이 죽었다’는 전문을 쳤다. 미 대사관은 1월 중순에 보낸 전문에서는 ‘사망자가 1,000명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콜롬비아 역사학자들의 추산 역시 제각각이다. 사망자가 800명에서 3,000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추정이 상존한다. 마르케스는 최대치를 소설 속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
비극이 일어난 원인은 무엇일까. 미국의 거대 과일회사 유나이티드 프루츠(UFC)사의 노동착취 탓이다. 30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며 외국계 자본의 이익을 대변했던 보수당의 힘이 빠지며 자유당이 UFC에 대한 조사에 나서자 노동자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화장실 설치와 기초적인 의료 시설 요구가 거절 당하자 1928년10월부터 지역 노동인구의 전부인 3만2,000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쟁의에 나선 노동자들의 요구는 크게 세 가지. 하루 8시간 노동과 주 6일 근무, 급여의 현찰 지급이었다. UFC사는 여기에 고개를 돌렸다. 콜롬비아 보수당 정부는 더 했다. 문제를 풀어나갈 실력도 의지도 없었다. 파업 초기 투옥됐던 노동자들의 식사를 정부와 UFC 가운데 누가 내느냐를 놓고 다투다 결론을 못 내고 풀어줄 정도였다.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에게 한 푼도 낼 수 없다는 UFC의 방침을 상징하는 게 급여로 내준 배급표(coupon). 콜롬비아 항구에서 바나나를 실어 미국 남부의 항구로 보내고 다시 내려오는 배에 미국산 농산물을 싣고 돌아와 노동자들에게 팔아야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 현금 대신 배급표로 급여를 지불했다.
노동자들은 실생활에 크게 필요없는 미국산 햄이나 농작물 밖에 살 수 없는 배급표를 마다했어도 UFC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핵심적 이익의 침해로 여겼다. 중미 일대 바나나 농장의 태생 자체가 ‘선박 활용 극대화’ 전략에서 나올 만큼 뿌리 깊은 이익구조였기 때문이다. 미국 작가 댄 쾨펠의 ‘바나나-세계를 바꾼 과일의 운명’(2008)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바나나를 맛보게 된 계기는 크게 두 가지다. 냉동기술 발달과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1848)’.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되기 이전에 인구 밀집지인 동부에서 금광이 발견된 서부로 가려면 최적의 코스가 파나마 지협을 경유하는 길이었다. 미국 동부에서 당시에는 콜롬비아 영토였던 파나마 지역까지 선박 편으로 온 뒤에 육로로 파나마를 건너를 다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게 가장 싸고 빨랐다. 문제는 동부에서 파나마까지 온 뒤에 빈 채로 돌아가는 선박이 많았다는 점. 이윤 극대화를 꾀하던 선주들은 미국으로 실어갈 무엇인가를 찾아냈다. 중미 지역의 기후에서 잘 자라는 바나나를 미국으로 수출하면 일거양득이라는 계산에서 미국 자본가들은 곳곳에 농장을 세웠다.
파나마 운하 개통(1914) 무렵, 미국인들의 식탁에 바나나가 일상적으로 올라오게 됐으나 선박업자들은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미국행 선박은 바나나로 가득 채웠으나 돌아올 때 배가 비는 만큼 비용이 나갔던 것. 결국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에게 배급표를 주고 미국산 물품을 반 강매했으니 불만이 높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이 무렵부터 바나나 전염병이 돌았다. 약을 쳐도 소용없고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기에는 ‘씨 있는 바나나’를 찾아내기도 어려웠다. 교배 실험에 시간도 많이 걸렸다. 결국 방법은 바나나 돌림병이 발생하면 기존 농장을 폐쇄하고 새로운 농장을 건설하는 수 밖에 없었다. 신규 농장을 세우는 코스트가 많아지며 채산성이 떨어졌다. 중미의 열대 우림은 날로 황폐해지고 바나나 노동자들의 삶의 질 역시 나빠졌다.
콜롬비아 국회가 국토 황폐화에 대한 조사에 나서고 UFC는 농장 전체를 코스타리카로 옮기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와중에서 발생한 게 바로 바나나 학살. 곪고 곪은 상처가 터진 뒤에는 폭풍우가 다가왔다. 콜롬비아의 정권이 자유당으로 바뀌고 미국계 기업들의 지원을 받는 보수파는 무기를 들었다. 자유당의 짧은 집권기 이후에 콜롬비아는 20만명이 죽는 내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나나 학살은 콜롬비아 역사가 갖는 비극의 상징인 셈이다.
바나나의 저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과테말라에서는 ‘바나나 쿠데타’까지 일어났다. 1954년6월 480명의 과테말라 쿠데타군은 정부군 5,000여명을 물리치고 9일 만에 승리를 거뒀다. 절대적인 병력 열세를 극복한 비결은 미국의 개입. 과테말라 민주정권에 의한 민족주의 확산을 방지하고 바나나 회사의 이익을 지키려 미국은 쿠데타군을 도왔다. UFC가 과테말라 바나나 생산의 93%와 철도와 항만, 발전소, 상하수도를 독점했던 상황.
새롭게 집권해 토지분배를 서두르는 민주정권을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좌익’으로 낙인 찍고 쿠데타를 사주하며 밀어줬다. 쿠데타 이후 과테말라의 경제개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들어선 것이 철권통치. 빈부격차 심화와 억압이 야기한 내전은 1996년 종식될 때까지 20만명의 목숨을 삼켰다. 쿠데타 이전의 민주정권 기간을 ‘10년간의 봄’으로 기억하는 과테말라인들은 결국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뤘지만 경제 주권 회복만큼은 여전히 요원하다. 중남미 대부분 국가의 경제 사정은 콜롬비아나 과테말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의 시대다. 탐욕과 착취로 일관하는 자본이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경과와 결과는 분명하다. 바나나 학살 이상의 저주와 비극. 마르케스는 1982년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백년 동안의 고독’ 말미를 이렇게 맺었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없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