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이 지금보다 절반 이하라면 어떨까. 살 판 난다. 당장 달러화로 표시되는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달러를 훌쩍 넘어선다. 자녀의 해외 유학에 아내까지 딸려 보낸 기러기 아빠들의 부담이 반감되고 대학생들도 보다 쉽게 해외연수나 여행에 나설 수 있다. 그런데 가능한 얘기일까. 쉽지 않아 보인다. 미화 1달러 당 1,170원 수준인 환율이 1,100원대 아래로 내려가도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아우성이니까.
하지만 미래는 몰라도 과거에는 그런 시절이 있었다. 절반 정도가 아니라 500원 아래였다. 경제 개발에 본격 착수하기 이전인 1961년께는 150원(당시 1,500환의 원 단위 수정치)이었던 환율이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거꾸로 올랐다. 일반적으로 경제가 발전하는 나라의 통화가치가 높아지기 마련이건만 유독 한국만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무역으로 성장한 독일과 일본, 아시아 신흥국들의 통화 추이는 한결같다. 평가절상.
일본은 1980년대 초반과 비교하면 엔화가치가 3배 가량 높아졌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마저 위안화 평가절상 압력을 받는다. 왜 한국만 원화 가치가 약해지고 있을까. 수출경쟁력을 품질보다 가격에 둔 탓이다. 시야를 42년 전 오늘인 1974년12월7일로 돌려보자.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비롯한 경제부처장관들이 합동 기자회견 형식으로 ‘국제수지 개선과 경기회복을 위한 특별조치’를 내놓았다. 새벽 6시에 소집돼 아침 8시30분부터 열린 임시국무회의에서 1시간 토론을 거쳐 의결된 ’12·7조치’는 요즘 같으면 상상도 못할 내용을 담았다. 우선 원화 가치를 떨어뜨렸다. 1달러당 397.5원에서 484원으로 21.7% 평가절하. 경제개발에 착수한 이래 지금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정부가 공식적으로 환율을 조정했으나 20%가 넘는 변동 폭은 유일무이하다. 1997년12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당시 환율이 요동칠 때도 하루 변동 폭이 12·7조치 수준은 아니었다.
충격파는 환율 뿐 아니었다. 석유류와 전기, 철도 가격이 줄줄이 올랐다. 석유류 제품 가격이 평균 31.9%, 전기요금이 42.4%, 철도화물요금이 39%씩 인상됐다. 프로판 가스는 51%, 부탄가스는 60%나 뛰었다. 유신정권은 왜 이런 ‘특별조치’를 취했을까. 1973년 말부터 시작된 1차 석유파동의 후유증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74년 하반기 이후 수출 부진과 국제수지 압박, 수요 감퇴, 재고 과다, 생산활동 저조, 고용 감소 등 경제 전 부문에서 빨간 불이 켜졌다.
당시 재무부장관으로 재임하던 김용환 새누리당 상임고문의 저서 ‘개발년대와 IMF위기시의 재정·금융정책 비사’에 따르면 ‘1974년의 석유수입대금은 (석유파동 직전인) 1972년 대비 약 5배인 11억400만 달러로 증가하고, 경상수지 적자는 5.4배인 20억2,200만 달러로 크게 확대됐다. 도매물가지수와 소비자물가지수도 각각 52%, 28% 상승하는 등 경제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어 갔다.’ 물가는 6·25 이후 최악이고 경제성장률도 꺾였다. 1972년 6.5%에서 1973년 14.8%를 기록했으나 1974년 9.4%에 이어 1975년에는 7.3%로 내려 앉았다. 무역수지 적자 역시 같은 기간 중 8.9 달러, 10억 달러, 24억 달러, 22억 달러로 늘어났다.
극심한 경제 위기에서 정부는 해외에서 돈을 빌려 적자를 충당하려 IMF와 협의한 끝에 해외 차입의 전제 조건으로 극약 처방을 내렸다. 국내에 미치는 영향과 국민 생활의 부담이 크다는 지적에 남덕우 경제부총리는 이렇게 답변했다. ‘환율 인상으로 물가가 11% 추가 상승할 것으로 보이나 내년 수출이 당초 예상한 56억 달러보다 4억 달러 늘어난 60억 달러에 이르는 효과도 발생할 것이다.’ 물가 안정을 해치더라도 국제수지를 방어하겠다는 뜻이다.
결과는 낙제점. 1975년 수출은 51억 달러 미만에 그치고 유신체제 말에는 무역수지 적자가 52.8억 달러로 불어났다. 원화가치를 떨어뜨렸지만 기대했던 수출확대보다는 물가를 자극해 국민들은 2년 동안 20%대 중반의 초물가고에 시달렸다. 생활이 어려워져도 국민들은 찍소리 하나 제대로 못 냈다. 다방에서 ‘물가도 못잡는 정권’을 비판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돼 징역 5년형을 선고받는 시대였으니까.*
경기는 세계 경제가 회복세에 들어선 1976년에서야 풀렸다. 중동 건설 특수도 경제난을 넘는 데 한 몫 거들었다. 그나마 오래가지 못했다. 1976년 13.1%를 기록했던 경제성장률은 수출 100억 달러 돌파로 잔치 분위기였던 1977년 12.3%를 거쳐 1978년 10.8%, 1979년 8.6%로 떨어졌다. 이란의 회교 혁명으로 2차 석유파동이 몰아친 1980년에는 마이너스 1.7%까지 주저앉았다. 결국 12·7 조치는 단기적으로도 중장기적으로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셈이다.
국민의 부담을 강요했던 12·7 조치는 상충되는 정책목표의 조합과 초법적 대책의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점을 말해주지만 교훈은 남지 않고 사람들의 행태도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아버지를 물려받겠다는 딸은 더 하다. 국가 행정조직보다 사적 친밀도를 중시하고 법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가 스스로를 궁지로 몰았다. 경제정책의 폐해는 가늠조차 어렵다. 가계부채가 누증하는 상황에서도 빚을 내 집을 사라며 부동산 투기를 부추긴 근시안적 경제정책이 몰고 올 후유증이 두렵다. 대통령만 그럴까. 기업도 마찬가지다. 정권에 아부하며 뒷돈을 대고 환율에만 목매는 수출 구조도 여전하다.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으로 환율에 의존하는 습성은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도 있다.
처음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한국이 다른 나라와 비슷하게 성장했다면 원화 환율은 지금의 절반 수준이어야 마땅하다. 국민경제가 누려야 할 성장의 과실을 누군가 일방적으로 가져갔다면 그 구조를 고쳐야 할 때다. 당장은 효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설령 늦더라도 지속 성장이 가능한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 세계 무역이 위축되고 있는 지금이 오히려 내실을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의 고통을 어떻게 감내하느냐의 문제가 남았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1974년은 격동의 한 해였다. 경제는 물론 정국도 숨가쁘게 돌아갔다. 연초인 1월14일 대폭적인 물가 인상과 서민생활 안정책인 1·14 경제긴급조치를 발동했음에도 경제는 나아지지 않아 결국 12·7조치까지 이어졌다. 정치판은 그야말로 요동쳤다. 광복절에는 육영수 여사가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에 맞아 숨졌다. 아내를 잃은 지 일주일이 지나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조치 1호와 4호를 풀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고 개헌도 입에 못 올리게 강제한 긴조 1호와 대학생들을 민청학련 사건으로 옭아맨 긴조 4호를 해제한 이유에는 해석이 엇갈린다.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납치 사건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을 희석시키려 했다는 해석과 3년 차를 맞는 유신체제에 대한 자신감에 기인한다는 시각이 상존한다.
확실한 점은 진작부터 불만이 끓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대학생과 지식인들을 시작으로 4월부터 개헌논의가 일어 유신헌법 철폐 목소리가 높아졌다. 박 대통령이 긴조 1.4호를 풀기 하루 전, 야당에서도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선명야당론’을 주창한 김영삼 의원이 만 47세 나이로 제 1야당인 신민당 총재로 결선 투표 없이 당선됐다. 김 총재는 바로 개헌 논의를 본격화했고 반독재, 반유신 투쟁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10월부터는 동아일보 기자 180명의 자유언론실천 선언을 시작으로 한국일보와 조선일보의 기자들이 언론자유를 외쳤다. 10월말에는 전국 72개 대학 중에 44개 대학이 휴강 상태에 들어갔다. 12·7 특별조치가 발동되던 날에는 개헌 논의를 요구하는 신민당과 통일당 의원들의 국회 농성이 이어졌다. 납치사건에서 극적으로 구출된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는 이날 농성을 격려하려 태평로 의사당을 방문하려다 경찰들에게 쫓겨났다. 경찰은 이를 취재하려던 기자들을 폭행해 물의를 빚었다.
반짝 빛을 보는 것 같았던 민주화 요구는 바로 억눌렸다. 서울대 영문과 백낙청 교수가 문교부에 의해 파면 당하고 최대부수를 자랑하며 유신체제에 비판적인 논조를 갖고 있던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탄압이 시작됐다. 1974년은 경제는 물론 정치에서도 격정의 시대였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던 시기, 국민들은 물가고와 유신의 압정에 이중으로 시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