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고위직 승진을 막는 ‘유리천장’을 깨자는 외침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국내 기업들의 여성 임원 비율이 점차 높아지는 추세지만 여전히 중요한 자리는 남성들이 꿰차고 있다. 변화와 혁신으로 대표되는 정보기술(IT) 업계에서도 유리천장은 강력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네이버의 한성숙 신임 대표 선임은 주목할 만하다. 단순히 유리천장을 깼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며 이뤄낸 성과이기 때문이다. 과연 최초의 여성 대표 체제를 맞이하는 네이버는 또 다른 혁신을 보여주게 될까?
내년 3월 네이버의 첫 여성 대표로 취임하는 한성숙 네이버 부사장.
“한성숙 네이버 서비스 총괄 부사장의 차기 대표 선임은 곧 이해진,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네이버의 1세대 경영이 마무리됐음을 의미합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시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차세대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죠. 이처럼 한 부사장의 차기 대표 선임은 네이버의 세대 교체이자 변화하는 시장에 대응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이번 한성숙 부사장의 대표 선임을 바라보는 IT 업계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한 부사장의 능력에는 어느 누구도 물음표를 달지 않는다. 그는 국내 인터넷 산업 초기부터 다양한 경험과 역량을 쌓아 왔다. 현재 네이버에서 서비스하고 있는 다양한 킬러 콘텐츠 대다수가 한 부사장의 작품이다.
애초에 여성이라는 성별은 대표 내정 과정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다. 네이버는 국내 IT 업계에서 유리천장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온 기업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지난해 기준 네이버의 여성 임원 비중은 15.6%로 국내 500대 기업 평균인 2.6%보다 월등히 높다. 지난 2013년 네이버가 설립한 모바일 전문 핵심 자회사 ‘캠프모바일’ 의 첫 대표 역시 여성인 이람 전 대표였다.
그럼에도 이번 한성숙 부사장의 대표 내정은 IT 업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앞서 언급했듯 능력에 이견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왜 하필 지금 시점에 네이버가 중대한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라는 의문이 많았다.
네이버의 CEO 육성 전략
IT 업계에서는 그동안 외부 인사를 스카우트해 대표직을 맡기는 방식이 통용돼 왔다. 네이버의 경쟁사인 카카오 역시 임지훈 케이큐브벤처스 대표를 외부에서 영입해 대표직을 맡기기도 했다. 혁신을 위해서는 외부에서 시장 트렌드를 객관적으로 읽어온 인물이 적합하다는 이유가 컸다.
하지만 네이버는 조금 달랐다. 네이버 창업자인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은 ‘회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내부에 있다’는 지론 하에 내부에서 차기 대표를 육성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특별한 후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이버 내부에서는 일찌감치 한성숙 부사장이 차기 대표가 될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IT 업계 관계자 A씨는 말한다. “네이버의 사업 전략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 네이버 사업의 양대 축은 포털과 연계된 서비스 플랫폼과 모바일 메신저 라인입니다. 전자의 경우 국내에서, 후자의 경우에는 일본에서 주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죠. 라인의 경우 이미 미국, 일본 증시 상장을 통해 사업이 본궤도에 올랐습니다. 급격한 변화를 시도하기는 어려운 시점이에요. 반면 국내 시장은 큰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모바일과 연계된 플랫폼 시장에서 카카오와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요 서비스를 직접 기획하고 성장을 이끌어온 리더가 필요한 시점인 거죠. 한성숙 부사장은 이러한 네이버의 니즈에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업계에서는 왜 하필 지금 이 시점에 대표 교체를 발표했느냐에 주목하고 있다. 김상헌 현 대표 체제의 네이버는 라인 상장과 온라인·모바일 서비스의 성과를 기반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올해 3분기 연결기준 네이버의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27.6% 증가한 2,822억9,800만 원이다. 같은 기간 매출은 20.5% 증가한 1조130억7,500만 원 수준이다. 네이버 분기 매출이 1조원 이상을 기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같은 성과에 축배를 들 법도 했지만 네이버는 다소 이른, 그리고 과감한 변화를 선택했다. 다양한 추측이 있지만 업계에서는 이해진 의장의 복심이 작용한 것으로 관측한다. 한 부사장에 대한 이해진 네이버 의장의 애정은 매우 각별하다. 실제로 이 의장은 지난 2007년 한 부사장이 NHN 검색품질센터 이사로 자리를 옮기는 과정에서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의장은 철저히 능력 중심의 인사를 추구해 왔다. 한 부사장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건 당연한 결과였다. 그는 검색품질센터 이사로 근무하며 검색 서비스를 한층 고도화했다. 지난 2012년 서비스 1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에도 한 부사장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오랜 기간 몸담아온 검색 분야가 아닌 ‘서비스 사업’이라는 새로운 영역에서도 잘 녹아들었다. 웹툰, 웹소설 등의 수익모델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지난해부터는 모바일 및 동영상에 특화한 서비스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한류 스타들의 인터넷 방송 서비스인 브이라이브(V Live), 네이버페이 등 모바일 플랫폼 서비스가 모두 한 대표 내정자의 작품이다.
특히 지난해 9월 선보인 브이라이브의 경우 지난 10월 기준 누적 다운로드 2,000만 건, 월간 사용자수(MAU) 1,600만 명을 돌파했다. 브이라이브 시청자의 절반 이상이 해외에서 발생할 정도로 글로벌 인기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브이라이브는 기존 K팝에서 벗어나 패션, 뮤지컬, 드라마, 장르 음악 등 다양한 주제의 콘텐츠 확보에 나서고 있다.
특히 이해진 의장은 최근 의장직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유럽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네이버로서는 이해진 의장이 유럽 시장 개척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국내 서비스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됐다. 한성숙 부사장은 이러한 과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갈 적임자로서 손색이 없다. 네이버 측은 “안정적인 경영 승계를 위한 목적으로 조금 일찍 신임 대표 선임을 발표했다”며 “기존 서비스의 고도화와 미래 콘텐츠 발굴을 위해서는 보다 빠른 대처가 필요한 측면도 고려했다”고 말했다.
네이버의 상생 프로젝트 ‘프로젝트 꽃’ 설명회에 참석한 한성숙 부사장.
상생과 기술 혁신의 두 마리 토끼 잡아야한성숙 부사장의 가장 큰 장점은 네이버 전반의 다양한 서비스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점이다. 서비스의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챙기는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꼼꼼함은 또 하나의 큰 무기다.
업계 관계자들은 한 부사장 체제에서 변화할 네이버의 핵심 전략 키워드로 ‘상생’을 꼽고 있다. 한때 독과점과 골목상권 논란의 중심에는 언제나 네이버가 자리 잡고 있었다. 김상헌 현 대표가 슬기롭게 위기를 극복해왔지만 여전히 공룡 IT기업으로서의 부정적 이미지가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 부사장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올해 초부터 시작된 창착자들의 작품 활동과 스몰비즈니스(소상공인 사업)의 창업·성장을 돕는 ‘프로젝트 꽃’은 상생에 대한 한 부사장의 관심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한성숙 부사장은 말한다. “네이버 플랫폼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스몰비즈니스나 창작자들도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성공의 열매를 맛보지는 못해요. 누군가는 성공을, 누군가는 실패를 경험하죠. 네이버 플랫폼에서 다양한 서비스를 선보이는 과정에서 했던 가장 큰 고민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과연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될까? 이러한 고민 끝에 ‘프로젝트 꽃’을 기획하게 됐죠. 네이버는 ‘프로젝트 꽃’을 통해 올해 말 기준 1만1,000여명의 신규 쇼핑몰 창업자를 양성했습니다. 또 안정적인 수익 창출을 돕는 다양한 지원도 이어갈 계획입니다.”
일각에서는 한성숙 체제의 네이버가 자칫 ‘안정’에 주목한 나머지 ‘혁신’에는 뒤처질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내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포털업계 관계자 B씨는 말한다. “최근 네이버는 미래 성장동력으로 ‘음성인식 기반 인공지능(AI)’, ‘로봇’, ‘자율주행차’ 등을 내세웠습니다. 이미 음성인식 AI 비서 서비스인 ‘아미카(AMICA)’를 공개한 데 이어, 3차원 고정밀 지도를 만들어내는 로봇인 ‘M1’의 제작에도 성공했다고 해요. 이러한 첨단 기술 분야는 그동안 서비스 사업의 한 우물만 파온 한 부사장에게는 다소 낯선 시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최상의 시나리오는 한 부사장의 강점인 서비스 사업에 첨단 기술을 융합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내는 것이겠죠.”
한성숙 부사장은 최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특히 업무 인수인계 작업과 대표로서의 청사진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회사 안팎의 신임과 기대가 큰 만큼 한 부사장의 어깨에 올려진 고민의 무게는 클 수밖에 없다. 과연 한 부사장은 공룡 IT기업의 첫 여성 대표로서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을까? 업계의 시선은 이제 한성숙 대표 체제의 네이버가 출범하는 내년 3월을 향하고 있다.
한성숙 네이버 대표 내정자 프로필
1967년 6월 생(만 49세)
1989년 숙명여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3년 민컴 기자
1994년 나눔기술 홍보팀 팀장
1996년 PC라인 기자
1997년 엠파스 검색사업본부 본부장
2007년 NHN 검색품질센터 이사
2012년 NHN 네이버서비스1본부 본부장
2013년 네이버 네이버서비스1본부 본부장
2015년 ~ 네이버 서비스총괄이사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김병주 기자 bjh1127@hmg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