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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일요일 오후 5시. 일에서 벗어나 온전히 쉴 수 있는 주말이다.
그동안 회사 일로 바쁘다고 데이트도 하지 못한 터라 토라진 남자친구를 달래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남친 손을 잡고 극장에 앉자마자 요란하게 울려대는 휴대폰.♬♪♩ (기가 막힌 타이밍, 도대체 넌 누구냐?)
발신자
영업1팀 ‘영눈치 선배’
나:(일요일 이 시간에 회사에서? 급한 일인가?) 여보세요.
영눈치 선배: 서경씨, 일요일에 미안해. 통화 가능해?
나: 네, 선배 무슨 급한 일이세요?
영눈치 선배: 응, 다름이 아니라 내가 다음 주 일요일에 결혼해!!! 서경씨, 와 줄 거지? 꼭 와야 해.
나: (두둥... 이 사람 일요일에 제 정신인가) 아... 그래야죠. 선배, 제가 지금 극장 와서요. 월요일 회사에서 청첩장 주세요
영눈치 선배: 아냐, 아냐. 바로 모바일로 쏴줄게.
전화를 끊자마자 카톡이 울린다.
모바일 청첩장 속에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신부 모드로 변신한 영눈치 선배가 환하게 웃고 있다.
#내가 돈으로 보이니?!
주말만큼은 회사에서 벗어나 온전히 자연인(사회인·직장인 모드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으로 지내고 싶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바다. 그런 일요일에 (감히?!) 회사 사람이 전화를 해서 청첩장까지 보내다니...
생각해보면 이 회사에 입사한 첫날도 날아오는 청첩장에 정신이 없었다.
나 : 안녕하십니까. 오늘 첫 출근한 이서경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 드립니다^^
90도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나에게 박열정 과장은 어깨를 두드리며 종이 한 장 건넸다.
박열정 과장: 오늘 첫 출근이라 힘들지?? 이번 주 토요일에 내 결혼식에 와서 맛있는 밥 먹고 가~
나: (이 밥은 공짜밥인가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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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팅, 선만 50번 본 끝에 결혼에 골인한 박 과장님은 그날 청첩장을 중국집 전단지처럼 모든 사원에게 뿌려댔다.
#일 년에 축의금으로 나간 돈만 100만원
입사와 동시에 수많은 선배들을 한 번에 알게 되면서 동시에 참석해야 할 각종 결혼식, 장례식, 돌잔치도 늘었다. 부모님을 따라 가서 축하 인사 한번 건네고 식사만 하고 나오던 시절은 지났다. 나도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싶다가도 통장에 찍힌 잔고를 보면 한숨만 나온다. 올해 낸 경조사비 한번 계산해보자는 생각에 통장과 다이어리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2월 10만원
4월 20만원
5월 30만원
7월 10만원
8월 5만원
10월 4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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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는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지 부고 소식이 잇따랐고, 봄 가을에는 풀린 날씨를 배경으로 결혼 소식이 쏟아졌다. 회사에 유독 결혼을 앞둔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요새 젊은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하려고 한다는 신문 기사는 딴 세상 이야기인 게 틀림없다!!
#경조사 관련 법이라도 있었으면...
어른들 말씀에 슬플 때 함께 슬퍼하고 기쁠 때 함께 기뻐해야 한다고 했다. 지금 내가 낸 축하의, 위로의 씨앗은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고도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 축하 위로를 함께 나눠야 하는 건지 막막하다.ㅠㅠ(이건 법으로 누가 좀 만들어줬으면...)
한숨 쉬고 있는 날 보던 옆 부서 이동기 대리가 ‘아직 멀었다’는 눈빛을 보낸다.
이동기 대리: 우리 부서 부장님 최근에 딸 결혼시킨 거 들었지? 딸 결혼식 청첩장을 부원들한테 다 나눠주더라. 우리가 얼굴도 모르는 부장의 딸까지 챙겨야 하는 건지… 참석 여부부터 축의금 액수 등등 우리 부서에서 이거 때문에 부서회의까지 열었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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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경조사 문제로 고민하는구나 싶던 찰나 휴대폰이 띵똥 울린다.
‘온라인영업2팀 무개념 대리 축 결혼 12월 24일’
와, 이번엔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결혼식이다!!!!(뭐냐? 이건!! 너만 행복하면 다냐, 내 크리스마스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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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기자 jik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