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상사도 부하직원도 민감해지는 시기.
바로 연말 성·과·평·가.
열이면 열 취지에 공감한다면서도 열 중 아홉이 결과는 납득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아이러니한 ‘불청객’.
일 년 간 무임승차한 동료는 불이익을, 나처럼 열심히 일한 사람은 인센티브는 물론 승·진급 플러스 점수를 받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늘 그랬듯 ‘평가’라는 단어가 주는 중압감은 크기만 하다.
나 역시 올해로 벌써 다섯 번째 성과평가를 앞두고 있지만 아직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아마 평생 익숙해지기 힘들겠지 싶다.
대학 때 강의평가를 마치고 성적을 확인하던 그때처럼….
어김없이 마음 한 구석은 불안감을 넘어 찜찜함으로 가득 차고야 말았다.
거의 모든 회사가 그렇듯 우리 회사의 성과평가도 개인이 e-HR 시스템을 이용해 자기 성과와 역량을 먼저 평가한다.
사번과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접속 버튼을 눌렀다.
‘이서경님이 로그인하셨습니다’ 알림 팝업을 닫자 연초에 수립했던 업무목표가 눈에 확! 들어온다.
그 아래쪽에는 내가 한 해 동안 이뤄낸 실적을 구체적으로 기입할 수 있는 공란이 있다.
하나 하나 아주 자세하게 기억을 더듬어가며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 그리고 이후 관리자의 평가를 제대로 받기 위해서 ‘꼼꼼함’은 선택이 아닌 필수 요소다.
나의 역량과 강점·약점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 정도면 다 썼다!!’ 확신이 들 때까지 반복해서 확인하고 나서 목표 달성 정도를 체크하면 비로소 끝이다.
상·중·하.
사실상 ‘하’는 논외다.
그 정도로 엉망으로 살지도 않았고 동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일을 내팽개치거나 떠넘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자신한다!
‘아, 출장 이후에 피곤해서 신입사원에게 일을 좀 과하게 나눠준 적은 있구나’
뭐, 그래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
‘그 정도는 후배도 배움의 기회로 삼았을 테지?’ 라는 자기 합리화까지 끝내고 나니 진짜 선택의 순간이 왔다.
‘상이냐 중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맡았던 프로젝트가 ‘중박’은 쳤으니 ‘중’으로 표시해야 할까 아니면 책임감 있게 완수했으니 ‘상’으로 표시해도 될까.
‘겸손함이 미덕인 한국 사회에서 자기평가에 최고점을 준다면 오히려 불이익이 있는 것 아닐까?’ 등등 그 짧은 순간에 오만 가지 생각이 스쳤다.
결국 고민 끝에 내 선택은 ‘중’.
나서는 것도 그렇다고 뒤처지지는 않는 딱 가운데.
올해도 ‘이 정도면 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성과평가라는 화살은 내 손을 떠났다.
이제부터는 내 몫이 아니다.
중간관리자와 조직책임자의 몫이다.
중간관리자가 1차 평가를 하고 다음 조직책임자가 최종평가를 해 평가등급이 부여되는 구조다.
이제까지 내가 받은 등급은 A, B, A, B 였다.
S, A, B, C, D의 다섯 등급 중 나름 중상에 해당하는 ‘중박’.
1년 간의 성과가 공식 성적으로 찍혀 나오게 되면 안도감과 더불어 허무함이 밀려온다.
특히 남에게 일 떠넘기기 신공을 발휘하는 박송곳 대리 같은… 기뻐해서는 안 될 동료가 웃음을 감추지 못하기라도 하면 울컥 내 안에서 뜨거운 것이 확!! 치밀어 오른다.
‘하긴 작년에 박대리가 S를 받았다는 소문이 있었지. 정말 말도 안돼. 얌체 짓은 혼자 다하는데 결국 회사 생활은 아부가 다라는 건가.’
‘내가 너무 겸손했나, 내가 한 성과를 생각하면 좀 더 후해도 되는데…’ 하는 후회마저 스멀스멀 올라온다.
사실상 자기평가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하다.
결국 최종 결정은 내가 하는 게 아니기 때문.
그래도 나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박대리랑 비교한다면 200% ‘납득 불가’지만) 등급을 받았으니 양호한 편이다.
‘성과평가가 왜 중요한가’라는 질문은 사실 ‘직장을 왜 다니느냐’라는 것과 비슷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회사를 다니는 직장인에게 ‘돈’ 만큼 중요한 건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혹자는 꿈 또는 비전이라고 하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돈이 현실이요 진리다, 물론 돈을 쓸 수 있는 9 to 6 근무환경도 중요하다)
그래서 성과평가는 중요하다.
내년에 내가 받게 될 연봉.
그 협상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기 때문.
주변의 많은 동료들이 성과측정 방식이 탐탁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반응을 보인다.
‘체념’하는 것이다.
불만을 표시하며 이의를 제기하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내가 더 높은 등급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일일이 설명하고 입증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보다 훨씬 어려운 건 ‘튀고 싶지 않다. 괜히 찍히면 어떡하나’와 같은 소심함과 불안감을 넘어 서는 것이다.
모두가 잘해도 모두가 못해도 그 안에서 서열을 정해야 하는 상대평가 구조 탓에 누군가는 고배를 마셔야 한다.
최하등급인 C나 D를 누군가는 받는다.
그게 내가 아니기만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간사하게도’ 지난 한 해 동안 큰 실수를 한 동료가 있다면 약간의 안도감이 밀려온다.
그 덕분에 내가 꼴찌는 아닐 테니까.
올 연말은 보너스를 두둑히 챙기는 해피엔딩이 될지.
나도 모르게 팀장에게 찍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혼자 처량하게 술잔을 기울이게 될지.
열고 싶지 않은 하지만 결국 열리게 될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연말 성과평가.
오늘따라 팀장님이 하늘나라 그분처럼 빛나 보이면서, 그분께 달달한 라떼 한잔 올리고 싶은 충동이 마구 솟구치는 건 기분 탓이겠지???
/김나영기자 iluvny23@sedaily.com
※‘#오늘도_출근’은 가상인물인 32살 싱글녀 이서경 대리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우리 모두의 직장 생활 이야기입니다. 공유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으시면 언제든 메일로 제보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