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시작했다 ¦ 브랜드가 된 남자 케네스 콜

이 기사는 포춘코리아 2016년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케네스 콜은 자신만의 신발 회사를 창업했다. 그리고 신발을 파는 가장 현대적인 방법을 깨달았다.

뉴욕 본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케네스 콜.
케네스 콜(62) Kenneth Cole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30년 전 신발 신생기업을 설립한 후, 고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 영화 감독 행세를 하기도 했다. 그 후 자신이 내세운 사회적 어젠다-에이즈에 대한 인식 고취와 노숙자 지원활동-를 기업 브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만들었다. 그는 1994년 기업공개를 했고, 2012년 2억 8,000만 달러에 회사를 다시 사들여 비상장으로 전환했다. 현재 케네스 콜은 다양한 종류의 의류와 액세서리를 판매하고 있다. 이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뉴욕 지역에서 자랐다. 당시 아버지는 브루클린에서 여성 신발 공장을 운영했다. 나는 에머리 대학교(Emory University)에 들어갔고, 곧이어 로스쿨에 진학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버지 회사의 한 고위 간부가 퇴사를 해 아버지를 돕고자 계획을 조금 미루기로 했다. 나는 법은 규칙들을 담은 책이고, 법을 가장 잘 배우고 가장 창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이 가장 멀리 도약한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하지만 사업은 매일 자신만의 책을 쓰는 것과 같았다.

아버지와 함께 2년간 일한 뒤, 우리는 이탈리아 수입 신발을 판매하는 캔디스 Candie’s를 설립했다. 그리고 1982년 나만의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자금은 부족했고, 신생기업 대부분이 실패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비즈니스 하기를 원하는 신발 공장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나는 신발 디자인과 원형 제작을 담당했고, 4만 켤레의 신발 제작을 주문하기로 약속했다. 상표권 조사나 등록을 빠르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내 이름을 따 회사 이름을 지었다.

그 당시 신발을 마켓 위크 Market Week (*역주: 일반 소매업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대규모 잡화 박람회) 에 먼저 공개했다. 트레이드 쇼가 열리는 뉴욕 힐튼호텔에 룸을 대여하거나 크고 화려한 쇼룸에 전시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나는 자금부족으로 둘 중 어느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힐튼 맞은 편에 주차 공간을 확보하면 그의 40피트짜리 트레일러를 빌릴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친구는 허락했고, 나는 시청에 주차 공간에 관한 문의를 했다. 하지만 해당 지역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기업이거나 뉴욕 시 홍보에 도움이 되는 영화 제작사가 아닐 경우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문구점으로 달려가 14달러를 들여 케네스 콜 프로덕션즈 Kenneth Cole Productions라고 회사명을 바꾼 편지지를 만들었다. 그 편지지를 이용해 ‘신발 기업의 탄생(The Birth of a Shoe Company)’ 을 촬영하겠다는 허가서를 요청하고, 1982년 12월 2일 힐튼 호텔 바로 북쪽에 40피트 규모의 이동 쇼룸을 열었다.

우리는 신발과 영화 촬영용 아크등, 스탠천 stanchions (*역주: 출입 제한 장소에 가설하는 손잡이용 지주)을 구비해 놓았고, 촬영기사도 있었다. 카메라에는 영화 필름이 들어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다. 구매자들이 방문했고, 트레일러 밖에 있는 전화부스에서 정기적으로 색상과 크기 같은 주문 관련 상담을 했다.

나는 3일 반 만에 4만 켤레의 신발을 팔았다. 그렇게 사업은 착착 진행되었다. 그 첫 해 500만 달러어치를 팔아100만 달러의 이익을 올렸다. 그 때의 스토리텔링과 지략의 중요성을 잊지 않기 위해 지금도 회사 이름을 ‘케네스 콜 프로덕션즈’로 유지하고 있다.

창립 초기엔 구체적인 계획이 거의 없었다. 직원과 자금이 넉넉하지 않았을 땐 상황의 흐름에 맞춰 계획을 짜 나가는 게 더 쉬웠다. 당시엔 보기 좋은 신발을 만드는 것이 내 일이라고 믿고 있었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신발은 발에 잘 맞고, 편안하고, 내구성이 좋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외관만이 아닌 구조 자체에 더 많은 투자를 했다.


나는 또 사람들에게 어떤 신발을 신으라고 말하는 것이 내 일이 아니라는 것도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신발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그 제품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어떤 신발을 신어보는지 관찰하기 위해 가게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밤에는 클럽에 가서 사람들이 멋을 낼 때 어떤 옷을 입는지, 어떤 스타일을 선호하는지 살펴보곤 했다.

그런 식으로 확장을 꾀함으로써 나는 신발을 팔 더 많은 상대를 찾거나 같은 사람에게 더 많은 제품을 팔 수 있었다. 나는 판매 제품의 카테고리를 좀 더 늘리기로 했다. 먼저 남성에게 주목했다. 1984년 만해도 남성들을 겨냥한 사업에는 변변한 게 없었다. 창의적인 사람은 이미 존재하는 것보단 없는 것에 더 주목을 한다. 그래서 내가 신고 싶은 고급 신발을 디자인하기 시작해 가게에 진열했다. 여성 핸드백과 가죽 외투도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의 경쟁상대는 대형 브랜드였기 때문에 우리도 회사 광고를 시작했다. 처음엔 주로 가벼운 농담 같은 광고를 했지만, 1985년부턴 에이즈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 이후 우리 브랜드는 완전히 바뀌었다. 나는 어떤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것보단 어떤 가치를 옹호해야 하는지 소비자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

당시 에티오피아의 기아에 관한 ‘라이브 에이드 Live Aid’와 ‘위 아 더 월드 We Are the World ’ 캠페인이 진행 중이었다. 나는 아무도 에이즈에 대해 논의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미국 에이즈 연구재단(Amfar·American Foundation for AIDS Research)을 지원하면서 사진가 애니 리버비츠 Annie Leibovitz와 업계 유명 모델들과 함께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 후 회사가 지원할 수 있는 여러 다른 캠페인도 진행했다.

나는 1994년 회사를 상장시켰다. 공격적으로 점포를 열고, 소비자와 직접적인 관계를 쌓았으며,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빚을 진 적이 없었는데, 상장이 계속 부채를 얻지 않아도 되게 해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적인 부분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일이 점점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더 큰 일을 하기 위해 몇 년 전 회사의 몸집을 줄이기로 결정했고, 여러 점포의 문을 닫았다. 나는 전자상거래로 새로운 사업모델을 구축하고 싶었기 때문에, 브랜드 작업을 다시 하기도 했다. 현재는 ‘용감한 계층을 위한 도시 유니폼’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요즘엔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탓에 디자인은 더 이상 독점적인 것이 아니다. 이제는 브랜드가 독창성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일관되고 기대에 부응하는 명확한 관점을 갖춰야 한다. 현실에선 모든 이들이 페이스북과 트위터, 인스타그램을 통해 자신의 브랜드를 정의하고 있다. 당신도 그들 브랜드의 일부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2012년 회사를 비상장으로 전환했고, 현재 나는 회사 지분의 80% 이상을 보유하고 있다. ‘성공’이라는 말은 지극히 개인적인 표현이면서도 위험한 것이다. 당신이 이미 성취한 성과에만 만족하고 있다면, 그건 아직 남은 일을 수행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도 항상 집중을 하고 있다.

사무실 내의 사회적 어젠다
케네스 콜
케네스 콜 프로덕션즈 창립자

우리는 모두 아침에 일어나 개인적인 일과 직업적인 일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결정을 한다. 내 경우에는 공동체 참여를 적절히 조화시키고 나만의 사회적 과제를 일에 포함시킨다.

지금 당신은 메시지와 그 영향력을 주시해야 한다. 투자수익률이란 무엇인가? 공동체 참여는 여전히

ROI(투자자본수익률)를 따지는 문제지만, 결국 그것은 참여에 대한 성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기업들도 그들만의 목소리를 찾도록 독려하고 있다. 그건 그들 존재의 근간이 되는 더 큰 공동체와 협력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나중에 돌려주기 위해 일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나눔을 성공을 위한 단계에 편입시킨다면, 그것은 좀 더 의미 있는 여정이 될 것이다.


서울경제 포춘코리아 편집부/INTERVIEW BY DINAH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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