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현지시간) 하와이 진주만의 애리조나기념관에서 헌화를 마친 후 진주만-히캄 합동기지로 자리를 옮긴 아베 신조(오른쪽) 일본 총리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바라보는 가운데 양국 관계의 진전을 이끈 ‘화해의 힘’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호놀룰루=AP연합뉴스
일본 히로시마와 미국 하와이 진주만 사이의 바닷길 7,000여㎞를 오가며 펼쳐진 양국 정상의 위령외교가 27일(현지시간) 막을 내렸다. 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를 위로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퍼포먼스 덕분에 양국 관계는 ‘신(新)밀월’로 격상됐지만 조만간 백악관의 주인이 바뀐 후에도 끈끈한 관계가 유지될지는 불확실하다. 이날 AP통신·니혼게이자이신문 등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 마련된 옛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희생자 추도시설인 애리조나기념관을 참배한 뒤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여기서 시작된 전쟁이 앗아간 모든 용사의 목숨, 전쟁의 희생이 된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영혼에 애도의 정성을 바친다”고 덧붙였다.
지난 5월 원폭 피해를 입은 일본 히로시마에 먼저 발을 디뎠던 오바마 대통령은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은 두 나라와 양국 국민 간에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면서 “전쟁의 상처가 우애로 바뀔 수 있고 과거의 적이 동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화답했다. 양국 정상이 함께 진주만을 방문해 희생자를 추모하고 헌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7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가 미국 하와이 애리조나기념관에서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희생된 이들에게 헌화하고 있다./AFP연합뉴스
주요 외신들은 이날의 연설을 토대로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히로시마에 이어 진주만이라는 상징적 장소를 답방하며 전 세계에 양국 관계가 최고조임을 과시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밀월이 내년 1월부터 출발하는 도널드 트럼프 차기 행정부의 외교정책에 따라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뉴욕타임스(NYT)는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은)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해온 두 정상에게는 상징적인 최고의 업적이지만 이 같은 접근법은 어느 때보다 더욱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에 대한 경계심이 뿌리 깊은 트럼프 당선인이 일본의 무역장벽, 주일미군 주둔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등 양국의 민감한 이슈에 자국 이기주의를 내세울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바마 레거시(유산)’를 뒤집으려는 트럼프 당선인이 유독 오바마 대통령과 친밀했던 아베 총리와 거리를 두려 한다는 분석도 나왔다.
그러나 파이낸셜타임스(FT)는 경제와 안보 분야에서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트럼프 당선인이 일본을 대아시아 전략의 파트너로 활용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서로에 필수 불가결한 ‘신밀월’이 이어질 가능성도 높다고 내다봤다. 미중 관계를 흔들려는 트럼프 당선인에게 아베 총리가 든든한 지역 내 동맹으로 버텨줄 수 있다는 점을 이미 차기 행정부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미다.
일부 외신들은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이 미일 동맹 과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진정한 사과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라고 꼬집었다. 특히 중국 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당군보는 “역사는 거래할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라면서 “(아베 총리는) 아시아 국가를 침략한 것에 대해 반성하지 않았다”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또 관영 환구시보도 사설을 통해 “과거를 바로잡고 싶다면 아베 총리는 난징 대학살의 현장인 난징과 7·7 사변의 현장인 베이징 루거우차오, 한국 서울 등을 찾아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