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일찍이 경험한 4당 체제를 떠올려보자. 지난 1988년 4월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민정당은 과반에 25석이나 밑도는 참패를 당했다. 1여3야의 여소야대 국회는 일을 안 했을까. 정반대다. 13대 국회 4년 동안 처리된 447건의 의원발의 입법 가운데 70%가 여소야대 시절의 작품이다. 특히 경제민주화 분야의 의원 입법이 많았다. 노동조합법·노동쟁의조정법 개정을 비롯해 추곡수매 국회동의제, 농어촌 부채경감 특별조치법, 토지공개념 관련 3법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가 활발하게 전개된 것도 이 시기다.
그러나 국민이 만들어준 권력 분할구도의 생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민정과 민주·신민주공화당 합당이라는 인위적인 정계개편은 국가에 안정을 가져왔을까. 통계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한다.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 초반인 1988년과 1989년 무역수지는 201억달러 흑자인 반면 3당 합당 이후인 1990년부터 3년은 113억달러의 적자가 쌓였다. 물론 갈수록 경제성적이 나빠진 것은 1980년대 중반의 3저 호황기가 사라졌기 때문이지만 ‘경제 성장을 위한 정치 안정’이라는 3당 합당의 명분을 잃은 것은 분명하다. 노태우 대통령이 재벌로부터 뒷돈을 챙겨 4,500억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자금을 쌓은 것도 3당 합당 이후다.
1987년과 2017년. 노태우 정부와 여소야대 13대 국회를 낳은 1987년과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따른 변화가 불가피해 보이는 2017년은 30년 세월의 시차를 넘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무엇보다 둘 다 시민의 힘으로 잉태됐다. 1987년 체제는 6월 민주화운동의 소산이다.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돼 연세대생 이한열 사망에 분노한 시민들과 넥타이부대의 힘이 대통령 직선제를 따냈다. 2017년 체제는 용기 있는 언론 보도로 시작돼 촛불의 힘으로 열리고 있다.
역사는 오묘하다. 3당 합당으로 날아갔던 4당 체제와 29년 만에 부활한 4당 체제가 비슷하다. 가장 소수인 신민주공화당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했던 것처럼 개혁보수신당이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앉았다. 새로운 4당 체제가 이전보다 나은 점도 있다. 예전에 비해 각 정당의 지역색이 많이 옅어졌다. 진보정당(정의당)까지 포함해 각 정당이 정치 공학이 아니라 정강정책으로 경쟁할 수 있는 기회다.
위기와 기회는 언제나 함께 있는 법이다. 재벌 총수들을 불러낸 국회 청문회를 떠올려보자. 총수들은 죽을 맛이었겠지만 앞으로 어떤 대통령이 재벌들에게 ‘돈을 내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수준이 한층 높아지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고 믿는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박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업적이 크다는 얘기도 이런 맥락에서다. 중요한 것은 이번 기회만큼은 살려야 한다는 점이다. 정당별로 당파별로 이해득실에 빠진다면 한국의 시스템은 2017년 체제는 고사하고 고장 난 1987년 체제에 머물 수도 있다. 일그러진 1987년 체제를 극복하고 민의를 오롯이 담은 2017년 체제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새해의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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