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새해를 맞으며 탈북민들은 가슴에 납덩이처럼 들어앉은 무거운 짐에 눌려 안타깝게 북녘 하늘을 바라본다. 눈이 오는 것마저 두렵다. 북녘의 맵짠 바람에 땔나무도 없어 차가운 구들에서 오돌오돌 떠는 두고 온 가족의 모습이 가슴에 맺혀서다. 기나긴 겨울을 또 어떻게 이겨나갈지, 북녘에서는 겨울 몇 달이 석삼년처럼 지겹고 지루하다. 따뜻한 오리털 동복을 벗고 홑옷에 맨발로 걸어야 마음이 편한 탈북민들.
진수성찬이 차려진 명절 음식상은 바라보는 것조차 떨린다. 수저를 들면 눈물이 앞을 흐린다.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감빨며 우멍한 눈으로 아빠 엄마만 쳐다보던 어린 자녀들, 설날이 와도 인절미 하나 손에 쥐여줄 수 없던 쓰린 기억이 생생하다.
때식 걱정, 땔 걱정, 입을 걱정, 신을 걱정, 오만가지 걱정과 근심에 사는 것이 고통이고 설움인 현실의 비정함에 웃음조차 잃어버렸던 삶.
북한 땅 어디를 둘러봐도 미래를 꿈꿀 어떤 희망도 찾아내기 힘들다. 과연 언제면.
지난해 12월 30일 새벽, 국경에 나온 외동딸과 몇 달 만에 전화통화를 했다. 딸은 3년째 이맘때면 어김없이 아빠를 찾아 국경에 나온다. 탈북 2년째 되는 해 딸을 국경에 불러냈을 때 딸은 “다시는 찾지 말라”고 “내게는 ‘반역자’ 아빠가 없다”고 말했다.
가슴에서 피눈물이 흘렀지만 이해는 했다. 내가 탈북한 후 결혼한 딸이어서 아직 사위도 장인이 서울에 건재해 있는 사실을 모른다. 알려지면 어떤 결과가 치러질지 모를 일이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딸이 삼 년 전부터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는 듯이 자주 국경에 나와 내게 전화를 건다. 그만큼 삶이 모질어졌다는 말이다. 나는 10년째 전화번호를 바꾼 일이 없다. 앞으로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딸뿐이 아니다. 조카들도 누이도 바쁜 일이 있으면 국경에 나와 내게 전화를 한다. 물론 그때마다 나는 그간 모아둔 돈을 보낸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날과 달이 흐르는 과정에 그것이 되레 내게 힘이 됐다.
앉아 있을 새가 없었다. 홀로 서울에서 살아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할 가장의 무거운 책임이 내게 힘을 주고 있다. 처음과 달리 나를 통해 남조선이 과연 어떤 곳인가를 점차 인식한 가족이다. 이번 설에는 싼 옷이나 입던 옷들을 모아 깨끗이 다림질해 몇 짐 잘 만들어 국경밀수꾼들의 손을 거쳐 북한에 들여보냈다.
설 명절에 모여 앉아 옷들을 나눠 가지며 그들은 분명 서울을 떠올린다. 중고 옷이라 해도 북녘에서는 보기 드문 고급 옷들이다. 전화통화 때마다 딸은 아빠가 서울에 있어 다행이고 너무 좋다고 말한다. ‘반역자’라는 말은 사라졌다. 적국이라 이르는 당국의 선전과 달리 북한 주민들에게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짐작을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탈북 정착주민 삼만 명, 모두 나처럼 북한의 가족과 연계돼 있다. 국토는 분열돼 있어도 마음은 하나로 산다. 통일은 멀리 있지 않다. 북한 주민들 속에 싹 트고 깊이 뿌리내린 한민족애가 이제 잎이 피고 꽃이 피기 시작했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2017년 새해가 밝았다. 통일은 남북이 합쳐지는 것만이 아니다. 통일은 독재에 시들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이다. 세계에서 당당한 거인으로 우뚝 솟은 자유대한의 강건한 모습은 북한 주민들의 희망·지주이며 앞날을 밝혀주는 인도의 샛별이다.
이지명 국제펜망명북한작가센터 이사장